[실패한 태극종주]
시작부터 조짐이 수상했다.
2박3일의 계획이 23, 24, 25일 인데 23일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잉, 26일은 약속이 있어 미룰 수 없는데..'
지리산 지도를 보며 몇번이고 스케일로 도상거리를 재보고 또 재보고 고민고민 하다가 내린 결론!
"까짓것, 1박2일에 쳐버리자."
밤머리재에서 천왕봉까지가 도상거리 18㎞, 주능선에서의 내 평균속도가 1시간에 2.67㎞이니 2.5㎞만 간다해도 7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또한 천왕봉에서 벽소령은 4시간 10분 연하천은 5시간 20분이니 벽소령은 11시간 40분 연하천은 12시간 20분이라 가정하면 새벽 5시에 산행을 시작하면 넉넉잡아도 오후6시에는 벽소령이나 연하천에 도착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날 산행은 더 여유가 있다 인월에 훤~해서 내려갈 수 있겠다.
좋다 24일 새벽에 시작하여 25일에 끝내버리자.
후후~ 실패한 지금도 지도를 보며 갸웃거리고 있다.
지리산의 동남능선을 너무 우습게 본 탓 일까
실패한 산행을 더듬어 본다
24일
05:30 밤머리재 출발
06:00 헬기장
08:50 왕등재습지
09:53 아침식사
10:22 출발
12:56 계곡물가(배 터지게 물 먹다)
13:25 계곡 출발
14:14 국골 4거리
15:49 하봉 지나 헬기장
17:15 천왕봉
18:05 장터목
25일
06:20 장터목출발
09:20 백무동
05:30에 힘차게 밤머리재를 차고 올라간다.
불과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온 몸이 다 젖어버렸다 땀 때문만이 아니고 스치는 풀잎이며 내 키 만한 잡목이 머금고 있는 이슬들을 나에게 모두 토해낸다.
1시간이 못되어 등산화 속의 양말이 완전히 젖어 철걱 철걱 소리를 낸다.
쩝 비가 와서 젖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자그마한 잡목들이 배낭 옆에 매달은 매트리스에 걸려 진도가 안나간다 몇걸음이 멀다하고 걸리적거리니 왕짜증이 난다.
09:53 아직 배는 덜 고프지만 양말 속의 발이 너무 불쌍해서 겸사겸사 아침을 먹기로 했다. 양말을 벗고 보니 온통 발가락이 하얗게 팅팅 불어 곧 살점 채 벗겨져 나가 버릴 것만 같다. 양말을 쥐어짜니 고린내 나는 물이 한 짝에서 두 공기 남짓 나온다. 양말이 두꺼워 발이 편했는데 이럴 때는 안 좋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짜서만 신어선 안될 것 같아 새 양말을 꺼내 신었다 아~~! 그 감촉...
내 계산상 앞으로 2-3시간이면 천왕봉에 도착할 것으로 짐작되어 가지고 있는 물의 전부인 0.5ℓ 2통을 홀라당 먹어 버렸다.
30여분 걸으니 다시 양말이 철벅거린다 아까 발 모양을 본 터라 그냥 가기는 불안했다.
이제 여분의 양말이 없어 아까 짜서 배낭 뒤에 걸어 놓은 걸로 다시 신어야 한다.
바꿔 신기를 이후에도 3-4차례는 더 했다.
이 시간이면 이슬이 없어질 때도 되었건만...
목이 몹시 탄다. 양말 짠 물을 먹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참았다.
12:00가 넘었다 황당하다 계산상 최소 국골 4거리는 나와야 하는데, 그건 그렇고 물이나 있으면 살겠는데 지도를 꺼내 열심히 독도를 해보지만 현 위치가 얼른 와 닿지를 않는다.
간간히 걸려있는 시그널들이 아니었으면 길을 잘못 든 걸로 착각할만하다.
불안한 마음에 자꾸 페이스가 오버된다.
그럴수록 나무가지들은 더더욱 배낭을 잡아 끈다.
발에 쥐가 나기 시작할 즈음 어디서 이상한 바람스치는 듯한 소리가 난다 진행 할수록 점점 소리가 커진다.
12:56
와~~! 이거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아냐???
배낭을 벗어 던지고 2ℓ 물주머니를 들고 30여m를 내려가니 세상에 이런 낙원이 있을까
숨도 안 쉬고 얼마나 물을 들이켰는지도 모른다.
사치스럽게 세수도 하고 나니 이게 천국인 듯 싶어 자리를 뜨기가 싫다.
출발하려고 일어서니 본격적으로 동시 다발로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심지어 왼쪽 허리부근 옆구리에서 쥐가 나고 손가락에서도 난다.
태어나고 처음 겪는 일이다. 어쩌다가 발에서나 기지게 켤 때 한번 쯤 낫을 뿐.
왜 이러지???
"꿀꿀~ 화다닥!!!" 바로 3-4m 옆에서 큰 개만한 멧돼지 두 마리가 놀라서 튀어 달아난다.
야생멧돼지를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첨이다. (휴~ 난 더 놀랐음)
14:14
국골이라 쓰인 바위가 나온다
미치겠다. 이제 국골4거리라니 계획대로 라면 장터목도 지나야 했을 시간인데..
15:49
중봉 못 미쳐 헬기장에 도착했다 야영객들의 쓰레기 더미를 보니 부근에 물이 있나부다 맘 같아선 한숨 자고 가고 싶다.
중봉에서 11시간만에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17:15
계획보다 5시간이나 늦게 천왕봉에 도착했다.
제기랄, 어떻게 된거지???
18:05
장터목 산장
세석까지 1시간 좀더 걸리면 갈텐데 가볼까 생각하다가 어차피 1박2일 종주는 물 건너갔고 이 쥐나는 다리로 사실 갈 자신도 없었다.
산장에서 햇반을 하나 사고 예약을 안해서 대기자 명단에 올리니 산장지기 하는 말
"칼잠 내지는 앉아서 자야할 경우도 있어요"
쳇 그렇게는 안 자겠다.
산장 처마 밑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라면을 끓였다. 라면이 익는 동안 육포 안주에 200㎖ 소주병에 담아간 시바스리갈을 홀짝 홀짝 아껴가며 먹었다.
라면국물에 햇반을 말아먹은 다음 일찌감치 통 비닐(120㎝,360㎝)을 한쪽을 묶고 안에 배낭 및 잡탕구리를 밀어 넣은 다음 안쪽 바닥에 매트리스를 까니 제법 잠자리가 그럴 듯하다 (밤바람에 비닐 펄럭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밤12시쯤 비닐은 배낭 채 말아 버리고 침낭카바를 꺼내서 잤음)
침낭 안에 뻗은 발을 조금만 움직여도 곧바로 쥐가 나서 한참을 앉아 주물러 대곤했다.
하지만 평생 잊지 못할 멋진 밤이었다.
밤10시에 소등을 한다했는데 언뜻 야광시계를 보니 10:45 그런데도 너무 환해서 고개를 들고 봤더니 엄청 큰 보름달이 빛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런 밝은 보름달은 처음이거니와 더욱 죽이는 것은 수많은 고추잠자리떼가 달빛에 실루엣으로 날아다니는 광경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스치는 바람과 부드럽게 애무하는 침낭카바의 감촉이 잠을 달아나게 한다.
밝은 달빛 때문에 초롱초롱한 별 들을 볼수 없는게 아쉬움이었다면 그건 욕심일까??
다리에 통증이 가라앉고 무슨 꿈인지는 모르지만 편안한 꿈속으로 빠져 든 것 같다.
25일
05:20
아침바람이 너무 상쾌하다
짐을 다 꾸리고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기왕 1박2일 태극종주는 물 건너 갔으니 어제 전화 후배가 알려준 연하천에서 와운으로 떨어지는 산행이나 할까??
05:40
세석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을 갔을까?? 쥐나는건 괜찮은데 호남정맥 탈 때 아팠던 오른쪽 무릎뒤에 통증이 온다 아뿔사! 그때 근 10일이나 치료 받았었는데 앞으로 산행이 줄줄이 남았는데 큰일이네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 침도 맞고, 물리치로도 받고 발맛사지도 받고 온갖것 다 동원해서 태극종주에 지장 없게 해야지
06:20
장터목에서 조심조심 백무동으로 하산
09:20
백무동 산행끝.
이번 산행의 교훈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을 속도로 평가하려한 등산 초짜에게 불과 하루여만에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단순 도상거리로 시간을 환산한 것 하며, 변칙적인 예외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둬야한다는 것 등등..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부딪히며 배우게 되겠지만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도전해 보고 싶다.
2013. 11. 30현재 조회수 : 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