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07 16:42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958  

부재 ( 不在 )
맑고 선명했던 일요일 봄날 새벽.
느닷없는 전화를 통해, 낯선 이가 전해 준 큰형의 죽음이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다.
여기저기 황망한 전화연락,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챙겨 급히 떠나는 전주행,
장조카와의 덕진경찰서에서의 만남, 시신확인,
이런저런 잡다한 결정들……그리고 스카이캐슬에의 안장.
장례를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불편했다.
솔직히 대부분의 가족에 대한 추억 속에
큰형은 대체로 부재(不在)의 상태가 압도적으로 많았건만,
떠나보낸 이후로는 기억 속에 큰형은 부재(不在)상태보다는
존재의 흔적이 점점 늘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만들어진 형제라는 구조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비틀어진 것도 불편했고,
큰형이 떠난 이유도 불편했고,
남겨진 절차들도 모두 불편했다.
1주기를 맞아 작은형이 특기를 살려 뭔가 큰형 1주기를 추모할 글을 준비하는 것 같다.
큰형을 떠나보내는 작은형 나름의 방식이리라.
문득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오래 전 읽은 이청준의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신문팔이 소년의 이야기인데,
버스정류장에 우뚝 서서 지니고 있는 신문이름을 모두 큰소리로 한바탕 읊어주고
신문을 판다. 예를 들어

“동아, 조선~♬ 경향, 한겨레~ ♪그리고 매경…..있습니다.”

이런 식이다.
읊다가 버스가 출발해 팔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소년은 나름의 운율을 만들어서 모든 신문이름을 반드시 읊고 나야 신문을 판다.
신문을 파는 게 목적인지 한바탕 읊어대는 게 목적인지 갸웃하게 만들 정도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신문을 들고 입을 꾹 다문다.
눈만 끔벅댈 뿐이다.
신문사 하나가 폐간되어 더 이상 그 동안 만들어진 운율이 맞지 않게 된 탓이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라서
이 소년이 새로운 운율을 만들었는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새로운 운율을 만들어서 씩씩하게 신문을 다시 팔았으리라……

2021년 6월
큰형 1주기에 부쳐 셋째가.


(잘 썼네....

은근하게 와 닿는 게 비유가 좋다)


형과 나는 4살 차이지만 나는 정월 생이라 꽉 찬 나이고
형은 섣달 생이라서 에민살이다
그래서 나는 7살에 입학을 하여 학교로는 3년 차이다
형과의 어린 시절은 싸운 기억이 거의 대부분이다
싸움은 언제나 형의 일방적인 억지와
나의 반발로 시작되는데 예를 들면
형 방과 내 방이 따로 있었는데 자기 방에서 나를 부른다.

"동주야, 동주야!"

방이 붙어 있긴 하지만 상당히 큰 소리로 불러야 들린다.
가보면 누워 있으면서

"불 좀 꺼"

내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못 꺼!“

하고는 문을 꽝 닫고 내방으로 와버린다
그러면 형이 쫓아와 안 끄려면 말지
왜 그렇게 문을 세게 닫고 가냐며 싸움이 시작된다.
일방적으로 내가 맞았지만 내 입은 쉬지 않았다

"야이, 셈비야! 독사대가리야!"(형 머리가 역삼각형 모양이었거든...)

나는 끝끝내 달려들었으나 손발로 반격 하지는 않았다
분풀이는 신발 속에 껌을 넣거나
영어 콘사이스 중간 중간을 찢어 없애는 게 다였다
이러한 사소한 싸움이 피아가 분명한
적대적인 관계로 굳어진 한 사건이 있었다.
형이 초등 6학년 내가 3학년 때의 일이다
매년 10월이면 백군과 청군으로 편을 갈라 격돌하는 운동회가 열렸는데
그 운동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남학생 계주였다
초딩이었으니 400은 아니고 50m씩 뛰는 200계주였을 것이다
그 시절 형이나 나나 운동신경이 좋았고
달리기도 잘했다
그래서 나는 백군의 스타트 주자였고
형은 청군의 라스트 주자였다
다시 말하면 3, 4, 5, 6 각 학년에서 백청군 한명씩
총 8명이 계주 주자로 뽑히는데
나는 3학년 백군 대표였고
형은 6학년 청군 대표라는 말이다
그 당시 전주중앙초 학생 수가 한 학년에 10여개 반,
한 반에 63~65명씩 각 한 년당 600백 명이 넘었고
전체는 4천명에 육박했으니 우리가 달리기 좀 했다 하겠다.
아마 우리 집이 못살고 공부도 못했다면
운동 특기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랑 대결했던 친구는 '설장호'라고
나보다 키도 등치도 약간 더 컸지만
달리기에서는 내가 항상 1~2m 앞섰다 4, 5학년 주자는 기억이 없고
라스트 주자로 형과 달리는 우리 백군 선배는 '나창기'라고
나중에 군산상고 야구선수도 했고 
어느 고교 야구감독까지 하게 되는 선배였다
이날도 어김없이 나는 1미터이상 리드상태에서
바통을 4학년인 2번 주자에게 넘겼고 라스트 주자에게 넘어갈 때까지
우리가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결승선을 얼마 남기지 않았는데
형이 추월해 나가는 게 아닌가!
아~! 누가 발이라도 걸어줬으면...
결국 형네 청군이 이겼고 전체 종합점수에서도 백군이 졌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그 후로 얼마나 이죽거리며 놀려대는지 형을 피해 아예 집을 안 들어갔다
그때부터 아마 가출본능이 눈뜨지 않았나 싶다
형이 중학교로 진학하고 나간 뒤에도
나는 졸업할 때까지 백군만 했다
어쩌다 줄이 청군으로 지정되면 바로 백군 줄로 바꿔서버렸다
이 사건 말고도 골이 깊어진 또 하나의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영원한 형과 나만의 쓰지 않은 묵시록으로 남겨두겠다

내가 형과의 싸움에서 처음 액션을 취했던 때는
형은 고3  나는 중3 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형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인 것이다
형은 놀라 물기어린 눈을 부릅뜨며

"니가.. 니가... "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형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니가 형에게 손을 대?‘

이때가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형의 억지도 줄었고 나도 어지간하면 받아줬다
어쩌면 그것보다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로 올라가고
그 뒤로는 전주에서 생활을 하지 않아 나와 부딪힐 일이 없어
싸우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형과의 좋은 기억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형과 나, 3~7살 즈음에 각각 찍은 독사진이 8×10 사이즈 정도로 확대되어
액자로 만들어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걸 떼어내려 창틀에 나란히 세워 타킷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갓 나온 모나미 볼펜의 머리와 꼬리를 분리하고
창자를 뺀 다음 빈 대롱이 총이 되었고
종이를 찢어 입에 넣고 침과 버무려 씹으면 총알이 되었다
종이가 너무 크면 총구에서 잘 빠져나가지 않고
침이 적으면 사진유리에 딱 달라붙지를 않는다.
이렇게 서로의 사진에 쏘아 불며 놀았는데
이것도 내가 형 사진의 얼굴이나 꼬추 부근에 명중시켜 붙이면
성질을 내며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진이 그때 내 타킷인 형의 사진이다

형은 꼼꼼하여 이런 사진을 다 모아놨는데(조카인 성열이에게 받음)

나는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방학 때면 거의
선친의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놀러갔었는데
형이나 나나 야구를 좋아하고 제법 했었다
야구 글러브를 가지고 가서 눈 덮인 밭에서 캐치볼을 하고 놀았는데
포수 미트도 있어서 서로 번갈아 포수 투수를 했다
이때는 싸우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기억이 그렇게 남는 이유는
모처럼의 다정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야구도 할줄 모르고 글러브도 신기하기 만한 동네 아이들에 대한
우쭐함 때문이 더 컸지 않나 싶다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뒤
부모님과는 학비나 용돈문제로 연락도 되고 교류도 있었겠지만 
나와는 단절되었다
5~6년 만에 볼 때도 있었고
무려 10여년 만에 볼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단절된 기간에 특별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 속의 서울 논현동은
허허벌판에 드믄드믄 집이 한 채씩 있을 뿐이었다.
그 집 중 하나가 형수의 집이었고
나는 먼발치에서 군장을 메고 가면을 쓴 채 비수 같은 눈빛으로
지폐를 한발 한발 즈려밟고 갈 각오를 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형 친구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지만
믿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정보가 샜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무리의 여인 군단이 거침없이 다가오더니
그 중 연장자인 듯한 이가 내 앞에 선다.
그리고는 기품 있지만 짓궂은 미소를 띠고
내 얼굴에서 수루메를 벗겨내며

"아이, 어려운 사돈께서 이게 무슨 일이래요?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여인들에게 줄줄 밀려갔고
우리는 선전포고도 못해보고 함을 빼앗겼다
함 값이야  서운찮게 받았다고는 하는데
'함진애비'가 동생이라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못내 의문이었다.
그때 동행했던 형 친구 중 변호사가 된
김영환형님이 작년에 형 영정 앞에서 한없이 한없이 울던 분이다 


이 분이 한없이 울던 김영환형님이다(작년 사진)



내 눈에 형이 행복해 보였던 시기는
대전 열매마을에 보금자리를 틀고 베란다에 정원을 꾸며 가꾸면서,
지리산에 가거든 희귀한 식물 보면 캐오라고 부탁하던 시기다
그때 용감한 형제들은 20살이나 연하인 여자들과 살면서
간혹 넷이서 짝지어 계룡대에서 라운딩을 즐기곤 했는데
유난히 지기 싫어하는 특이한 성격의 형은 내기도 안했을 뿐더러
스코어카드도 아예 못 적게 했다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하고
형은 또 한 번의 이혼으로 파국을 맞고 말았지만...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명절이나 제사 때
그동안은 참석률이 저조했던 형은
나름 장남의 역할을 하려는 듯 열심히 참석도 하고 관심도 가졌지만
과연 우리는 그 노력을 알려고나 했는지...
형이 전주로 오고난 뒤의 상황과 사연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떠올리기도 싫다
모든 하나하나가 형의 등을 떠밀었다는 느낌뿐이다

형은 공부도 잘했지만 미술 쪽에 재능이 남달랐다
그래서 건축과를 선택했겠지만...
글씨체는 독특하고 보기 좋았다 그래서 어릴 때 형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나는 아주 악필로
비록 실패한 오마주이지만
나에게는 평생 남겨진 형의 자취라 하겠다.


10여년 전 내가 한참 DIY에 빠져있었을때

만들 수 있겠느냐며 형이 준 도면이다,,,,,,

이것은 내가 그린 도면이다

글씨를 보면 닮으려고 한 무의식이 여실하지 않은가~!



2021. 6. 1(화) 음 4. 21


조카 성열이와 동생들은 양력으로 기일에 추모관에 다녀갔다

나는 음력기일(4. 23)에 가려했으나 쉬는 날에 맞춰 2일 앞에 간다



나에게 남은 단 한 장의 형과의 사진이다

이걸 유골함옆에 놓고 싶었다



콩날물국밥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라

사우나는 6시 오픈 국밥집은 5시 30분 오픈...   그래서 시간 때우느라...

그런데 이집 완전 버렸고만.... 전주 3대 콩나물국밥집으로 꼽았던

다올, 오거리  이 집 미가옥이었는데 이제 미가옥은 빼야겠다

알고 보니 주인이 바뀌었다네.....

어쩐지....



분당시내 복판은 아니어도 시내에 있는 스카이캐슬 추모관


유골함 개방을 하려면 신고된 상주 허락이 있어야하는데

성열이와 연락이 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다


......................



여직원이 열고 있다



좀 허전했었는데 낫긴한데....

여자가 없네.....

성열아 어떻게 좀 해봐라~~



하긴 주변에 많다 뭐......


이제 언제 또 올지 모르겠네...



우동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고

너무 졸려서 정안 휴게소에 들어 왔다


전주 가면 술이 필요 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