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1-08 12:42
차와 나 (1)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85  
1. 브리샤픽업(1981~1983?)




기아에서 만든 최초의 '브리샤' 브랜드의 미니트럭으로 1973년 8월에 선을 보였다가 
현대의 포니에 밀려 1981년에 단종되었다고 한다


80년 10월 제대하고 집에 오니 차가 2대가 있었다 
브리샤픽업과 브리샤 K303인데 K303은 승용차였고 브리샤픽업은 앞쪽은 승용차고 뒤쪽은 적
재함으로 된 미니트럭이다
그 당시 선친께서는 운수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산림 쪽에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진안 마령에 153정의 임야를 사들여 조림과 표고재배 등을 추진했던 터라 픽업트럭은 요긴하
게 쓰였다 픽업은 전병수씨라는 산 부근 동네에 사는 관리인이 주로 산에서만 운행을 하고 있
었는데 내가 제대하고 산을 왕래하면서부터는 내가 잠시잠시 전주를 다녀올 때나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내가 사용을 했다 
무면허라 선친께는 쉬쉬했지만 모르셨을 리 만무하다
픽업과 얽힌 기억은 3가지가 정도가 떠오르는데 

첫 번째는 앞서 서문에서 이야기했던 
무면허 음주 과속으로 진안 장승리 검문소에 걸렸던 것이고 

두 번째는 밤늦게 전주에서 산으로 들어가다가 길옆의 조그만 꼬랑으로 
조수대 앞뒷바퀴가 빠져버렸다
 
마령면 소재지에서 우리 산이 있는 '막골'까지는 약7~8키로 되었는데 
우리 산을 마지막으로 길이 끊어진다. 
마령에서부터 강정리, 월운리, 덕천리를 거쳐 우리 산까지 오는데 
각 리마다 2~3 개의 마을이 있고 하루에 한 대 들어오는 시외버스는 
오후 4시경 전주를 출발하여 신리, 관촌을 경유하고 좌산, 성수, 마령을 거쳐 
우리 산이 있는 '막골'은 저수지가 있어 못 올라오고 
바로 저수지 밑 마을인 추동까지 온다 
여기가 종점이고 버스는 추동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나간다 
이 촌구석에서 하룻밤을 지내야하는 기사는 따분하고 싫어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장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식사도 아주 괜찮고 
이장이나 마을사람들의 대우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추동에는 약 25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18세~25세 사이 아가씨들이 가구당 평균 한 명 이상이었다 
그러니 이건 물반 고기반이 아니라 물은 없고 그냥 고기만 있는 셈이다
실제로 몇 년 전에 노총각 기사가 동네 아가씨와 눈 맞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1살 많은 지금은 돌아가신 사촌형도 
그 동네 '공니'라는 이름의 처녀와 결혼을 했었네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한 살이 많지만 학년은 같아서 늘 
"동탁아, 동탁아," 
하며 한 번도 형 대우를 안 해줬었는데...
나도 그 많은 고기를 두고 침을 흘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산골 마을의 스캔들은 금방 퍼져 발목 잡힐 게 뻔했고 
무엇보다도 산지기 부인(내 기억속의 여자들 10화)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으며 
나 스스로도 산주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성직자 컨셉으로 두루두루 관심을 받고 싶은 얄팍한 속셈도 있었다

차가 빠진 곳은 다행히도 추동에서 두 정류장 떨어진 덕천리 대동마을 부근이었다.
시간은 저녁을 먹고 다 치웠을 만한 때였는데 
염치를 무릅쓰고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렸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3살 많은 20대 후반이었다
자초지종을 얘기 하자 매우 호의적으로 따라오라 손짓을 하고 
골목으로 구불구불 한참을 가더니 마을 회관인 듯 한 곳에서 문을 열어제끼며...

"어이 철규, 자네 경운기좀 가꽈야 쓰것네 산막 차가 꼬랑에 빠졌다네"

나는 그때 우리 산을 바깥에서 '산막'이라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방 안에는 청장년 대여섯 명이 화투와 장기판을 벌리고 있었다 
고맙게도 철규라는 사람이 다른 한 명을 데리고 나왔고 
경운기를 가져와서 차는 간단히 빼냈다 
철규는 성씨가 전씨로 나와 같은 또래였고 산 관리인인 전병수씨의 먼 조카뻘이었다
진안 마령의 이 부근은 '전'씨 집성촌들이 많았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인 '전병관'도 여기 출신이다 
그들은 차를 빼주고 나를 회관으로 이끌었다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배가 좀 있었고 철규가 인사를 시켰다
누군가가 더덕주를 가지고 왔고 나는 원래 담근 술을 안 먹는데 그날은 어쩔 수 없이 마셨다 
그 날의 인연으로 농한기 때면 표고버섯 작업으로 인부들이 필요했는데 
그럴 때면 대동마을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뽑았다
또한 가을이면 연장리, 강정리, 월운리, 덕천리 4개 리대항 체육대회가 벌어졌는데 
덕천리에는 대동, 장계동, 추동, 막골 4개 마을이 있어 
나는 주소는 옮겨져 있지 않았지만 막골 주민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나는 축구와 계주에 출전했는데 마지막 계주에서 3등만 하면 종합우승인데 
내가 욕심을 부려 1등으로 치고나가려다 넘어져버려 우승도 놓치고 
내 무릎은 다 까지고...
이때 주축들이 대동 청년들이었으니 
어쨌든 픽업 사고가 여러 인연을 만들어 냈다 

픽업과 관련된 세 번째 마지막 이야기는 좀 낯 뜨겁다 
'내 기억 속의 여자들 19화'에 이미 소개되어 있는데, 
순진하고 착하게만 생긴 그녀가 픽업트럭만 타면 
요물바가지가 되어 오럴로 파고든다!

한물 간 625개그에 남녀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둘 다 사망을 했는데 남자 꼬추가 없어졌다는...

나도 그때 사고가 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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