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2-23 13:37
미리 써 보는 머리말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609  

머  리  말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가족, 경제, 대인관계 등 어느 하나 정상적인 게 없다 이제 70을 앞두고 있으니 만회나 회복
도 불가능하다

나의 시작은 불공평하게 앞서서 출발했다
베이비붐시대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직장도 낙하산으로 들어간다.
결혼과 동시에 아파트도 한 채 물려받는다.
 '지리산 그늘이 삼도 팔백리'라고 그야말로 그 그늘 아래서 모자라는 것도 귀한 것도 모르고
누리 듯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10.26 12.12 5.18 같은 격동기에도 민주화운동은커녕 좌우의 이념이나 현실에 대한 가치관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시절에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핑계가 있긴 하다
직장도 별 어려움이나 스트레스 없이 다녔다 신입 때는 낙하산이란 보호막이 있었고 중견 때
는 회사의 오래된 구태를 벗고 혁신하려는 사주의 의지로 새롭게 기용된 임원진들에게 인정을
받아 IMF 후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승승장구 했다
퇴사 후에 조차도 전 직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대부업이나 시행업을 했으니 나 혼자의 힘으로
는 뭘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몰락과 실패는 돌이켜 보면 '이재(理財)'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 있지만 좀 포장을 해보
면 '재물에 대한 무욕'이 아닐까(그러니까 나는 성직자가 되었어야 했다니깐)
경제적 파탄은 스스로는 물론 가족과 사회생활마저 도미노로 무너뜨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부도로 손을 들을 당시 공적, 사적 부채가 200억이 넘었는데
(10년 뒤 2018년 파산면책 신청 했을 때는 473억으로 늘어났다) 개인채무로 보증을 서줬던
동료들에게는 가까스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털고 손을 들었을 때,
집도 절도 없이 친구 사무실 한 쪽에 라꾸라꾸 하나 놓고 기거를 할 때 참으로 막막했지만 한
편으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억지로 빌려와 홀가분하다고 스스로를 부추겨 보기도 했었다 아
니 실제 인생에 대한 체념과 함께 공허한 편안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동안 그런 편안함을 견디다가 60이 되어서야 노후대비 궁여지책으로 개인택시를 목표로
회사택시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 일생에서 아무 도움 없이 제대로 마음먹고 혼자
시도한 첫 번째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 내 재정 상태는 몇 백억의 빚이 있었을 뿐 보증금 300만 원짜리 원룸과 핸드폰
마저 타인이 빌려준 것이었다.

이렇듯 온전치 못하게 세상을 살아오면서도 일관되고 유일하게 해 온 것이 있었다.
소질도 재주도 심지어 특별한 목적도 없이 끄적거려온 낙서 같은 글들이 그것이다
학창시절과 군 생활 때부터 써 놨던 두꺼운 대학노트는 언젠가 어디선가 분실해버렸고 20여
년 전 지리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홈피를 만들어 산행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다른 게
시판을 만들어 주절주절 넋두리를 늘어놓은 게 합치면 게시번호로 1,000번이 넘고 사진도 몇
만장에 이른다. 그런데 이 20년이 몰락하여 나락에 떨어지는 내 어두운 시기와 딱 맞아떨어지
니 열심히 끄적거렸던 나는 실패해가는 나의 페르소나였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써왔던 만큼 글들에 대한 애착이나 소중함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작년(2021년) 10월 개천절 연휴기간 2~3일 동안 홈피가 먹통이 되었다
이때가 처음이 아니고 8월 광복절에도 그랬었고 그전에도 간혹 연휴 때면 장애가 있다가 휴일
이 지나고서야 원상복구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이유도 각각이었다.
암튼 내 홈피가 연결되어 있는 호스팅회사가 뭔가 문제가 있고 불안했는데 옮기려 해도 데이
터가 너무 방대해서 엄두를 내지 못할 뿐더러 백업을 받는다 해도 그 뭉떵 거려진 쓰레기덩어
리를 언제 어떻게 펼쳐볼지도 막연한 일이다

작년 10월 홈피가 먹통 되었을 때의 일이다
자주 홈피에 들어와 보던 친구가

"왜 홈피가 안 열리네?"

"잊을 만하면 그러는데 아무래도 호스팅업체가 좀 불안해"

"그러다가 그 회사 망해서 다 날아가면 어떡해"

"날아가면 말지머"

"너무 아깝잖아"

"..........   "

이 대화 전까지는 써놓은 것들이 날아가 버린다는 가정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근데 '진짜 없어져?'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니 대부분이 쓸데없는 것들이긴 하나 몇
몇은 아까운 것도 있었다.
이걸 계기로 며칠 궁리를 하다가 딴에 어려운 결론을 냈다

'그래, 골라서 책으로 묶자!'

이룬 것도 남길 것도 없이 저물어가는 생인데
마지막으로 그거 한 권 만든다는데 괜찮지 않겠어?
책은 2025년에 70세 기념으로 내기로 했으니 4년이나 남았지만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
이 급하다
책 편집 앱이나 프로그램 등을 여기저기 알아보니 귀결되는 게 어도비에서 나온 ‘인디자인’이
란 프로그램이었다. 최신버전은 구하기 어려워 구버전으로 일단 깔아놓고 책도 한 권 샀다
여유 있는 자비출판을 위해 적금도 들었다
노트북과 외장 메모리도 준비했다
책 제목도 열심히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하룻밤의 꿈'이라고 하려하다가 임팩트도 없고 허무주의 같아 포기하고 곧이곧대로
'실패한 인생의 아까운 쓰레기'라고도 생각해봤는데 너무 긴대다가 신파적이어서 혼자 쓴웃음
을 지었다
고민 고민 하다가 잠정적으로 '패자의 기록들'로 결정을 했다
나중에 책이 완성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런 과정이 즐겁다
이제 머리말을 다 썼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
수록할 것들을 뽑아 아래한글에 옮기는 한편 같이 올릴 사진도 파일에 정리하고 인디자인 공
부를 열심히 해서 편집까지 내 손으로 완성해 봐야겠다.

2022.  2. 15  미리 써 본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