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8-02 18:05
아버님의 초상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144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5(2009. 12. 10)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뜬금없이
아버님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게시 글을 올리는 데는 두 가지 우연찮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 번째는 전주 남부시장에서 50여년을 장사를 하셨던 내 학창시절의 여자 친구 어머님에게
서 아버님의 20대 초반의 사진이 있다고 한 말은 전에부터 들어왔지만 실제로 이번에 그 사
진을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 어머님은 선친과 같은 동향 사람으로 선친께서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초등학교 교
편을 잡고 계셨을 당시 학생이었다고 했다. 나이 차이는 불과 5살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러저러한 인연으로 1960년대, 전주 남부시장에 정착할 당시 선친의 도움을 받았다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진을 받았을 때는 그냥 사진 설명만 덧붙여서 내 홈피에 올리려했는데...
 
그 즈음 문창극국무총리 후보에 대한 역사인식 비판과 친일 관련 발언 기사들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었고 그로인해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입버릇처럼 추호의 부끄럼이나 망설임
없이 우리 아버지는 친일파여~~’ 라고 말했던 것이 연결되어 이제는 뭔가 그렇게 말했던 것에
대하여 다시 말하면 친일(親日)’에 대하여 스스로 정리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창극 사건을 계기로 어버님의 친일에 대하여 다시 정리해 본다는 것이지 감히 아버
님과 문창극이 따위를 비교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KBS에서 터트린 문창극의 발언들은 아무리 교회 안에서, 특수한 주제를 가지고 한 것이라지
만 애국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닌 내가 듣기에도 분통이 터졌다
일제침략 등이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준 시련이란 말은 그렇다고 치고...
거침없이 주둥빼기에서 나오는 이조민비니 하는 단어들은 식자층이 아닌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쓰지 않는데 어떻게 배워 처먹었으면 그리 쉽고 자연스럽게 반복해서 나오냐는 것이다
 
내가 우리 아버님 시대에 직접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해도 그 당시의
어느 쪽인가를 판단해야하는 의식이 있는 층에게는 요즘 같이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중도
니 하는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빨갱이 아니면 친일 둘 중 하나밖에는 없지 않았겠는가.
 
선친은 1922년생이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문화말살정책의 중심에서 교육을 받으셨다
물론 할아버지가 독립군이었다면 상황은 또 틀려졌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약간은 여유 있
는 평범한 농사꾼이셨다. 그럼에도 20대 초반에 다니셨던 초등학교의 선생을 맡으셨다한다.
 
일제 때 젊은 초등학교 선생이 뭘 가르쳤을까?
 
내 기억에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고 반론을 강력히 주장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좀 먹고 사는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밥상에 반찬이 3-4가지 이상 올라
간 적이 별로 없다
손님이 왔을 때나 명절 등 특별한 적 외에는...
된장국에 김치에 나물 한 가지에 생선구이 하나 정도?
다시 말해 일본식 밥상문화라 해야 하나?
아버지에게는 이런 식문화가 우리의 올바른 식문화인양 뼛속 깊이 배셨으리라
 
그것에 대하여 우리 고유의 ~첩 반상을 설명하며 내 일생에 딱 한 번 아버지를 반박했다
그때, 의외로 아무 말도 없으셨다 아니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의 눈빛이셨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건 지금의 내 밥상도 아버님의 밥상을 따라 간다는 것이다
반찬이 여러 가지면 은근 짜증난다.
다음 끼니에 먹어도 될 것을 괜히 너줄하게 늘어놓으면....
 
어릴 때(60~70년대) 아버지는 유난히 일본을 자주 가셨다
재력 있는 재일교포 사업가 친구 분들이 몇몇 계셨기 때문이다
 
전주에 한학과 철학을 하시는 아버님의 친구 분이 계셨다
두 분이 만나시면 무슨 비밀 말인지 일본말로 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
 
내가 내입으로 우리 아버지는 친일파여~’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1948년에 태어나 서울대까지 나온 중견 언론인께서 스스럼없이 내뱉는 이조시대 운운....’
민비운운 하며 자기는 절대 친일이 아니라고... 내가 왜 친일이냐고....
우리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고(공식 검증이 안 된...).....
 
친일 아닌 저 사람 보다는 차라리 우리 아버님의 친일이 500번 낫다
 
(옛날 사진 한 장 올리려다가 사설이 엄청 길어져 버렸다)
 
그럼 지금부터 아버님의 사진을 올려보자
 
 
 
1944년 2월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초등학교 졸업식
 
 
 
왼쪽 아래가 아버님
 
 
 
우측 아래가 5살 아래 제자인 내 친구의 어머님
 
 
 
아버님을 확대한 사진
1944년이니까 우리 나이로 23세.....
 
 
 
사진을 제공해 주신 여자친구의 어머님이자 아버님의 제자
현재 87세 정오남님
 
 
 
50년 넘게 이자리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나에게 사진을 주신 10여일 후에
장사를 접고 가게를 넘기셨다 
 
원래는 여기까지만 올리려고 했는데
가만이 생각해보니 기왕 올리는거 아버님의 연령대별 사진을 올려보는게 좋을 것 같아
진북동 큰집에 가서 사진을 골라 온다
 
 
 
80대 진북동 큰집에서....
 
 
 
70대 소산원에서....
 
 
 
60대 중국 방문때.....
 
 
 
50대, 지금은 팔아 버린 전동집 정원에서....
 
 
 
40대, 제주도 공항에서....
 
 
 
30대, 완산동 집에서....
 
 
 
20대후반 6.25 전쟁중에....
 
 
 
그리고 아버지의 어머님인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