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20 17:59
[구형왕릉에 대하여...]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232  
구형왕릉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으로 알려져 왔다.
구형왕은 김유신의 증조부로, 가야주민들을 보호하는 조건하에 신라에 복속했고
그것을 부끄러이 여겨 유언으로 자신은 흙에 묻힐 자격이 없으니 돌로 무덤을 쌓으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16세기 인근의 왕산사가 구형왕이 살았던 수정궁이었을 것이라는 조선 사료
에 의해 구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지금도 표지판에 ‘전(傳) 구형왕릉’이라 표기되어 있다.
엄연한 사실에 대해 왜 구전되어 왔다는 의미의 ‘전(傳)’를 붙였냐면서 김해(?짐작)김씨의 후손들은
이 ‘전(傳)’자를 떼려고 다각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왕릉이라는 것에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나 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고 그로부터(6세기) 천년 뒤인 16세기의
조선사료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제, 신라, 가야 통틀어 적석총(돌무덤)은 전혀 발견된 적이 없고,
고구려에는 적석총이 있긴 있는데 왕의 무덤인 만큼 그 양식은 규칙적인 배열과 균형, 그리고
웅장미가 있어야 되는데 구형왕릉은 너무 그런 조건에 미흡하다는 것이다.
셋째 수정궁이었다는 왕산사 터를 현재 발굴 중에 있는데 아직 6세기때의 유물은 발견된 것이
없어 만약 왕산사가 수정궁터가 아니라면 왕릉이라는 설은 힘을 잃게 된다.

따라서 학계의 일반적인 이론은 단성, 의령, (산청), 울산 등지에 드물게 분포되어 있는,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상징물인 돌무더기탑 이라고 조심스레 내놓고 있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구형왕릉 갔을 때 표지판을 찍어오거나 자세히 좀 읽어 볼걸...)

오늘(4/4수) 아침 TV에서 나온 내용을 대충 짜깁기해 본 것...



2003. 5. 8 지리산주변 사찰기행때 찍은 사진



2007. 3. 18 왕산 산행때 사진 (찍어 놓길 잘했네)

2013. 11. 30현재 조회수 : 1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