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7-05 01:16
유리성에서의 하룻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479  

2018. 7. 5(목)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넓은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기괴한 모양의 조선솔이 경비병처럼  둘러 심어져 있
었고 그 잔디정원 뒤편으로 성을 연상케 하는 웅장하
고 신비스러운 3층짜리 투명한 유리로 된 집이 있었다.
이곳이 내가 초대된 곳이다 시간을 착각했는지 날짜를
착각했는지 모르겠는데 나 혼자였다 주인 내외는 완전
히 대조적이었지만 의상의 스타일과 색채가 묘한 조화
를 이루고 있었다 남자는 지친 듯 거친 얼굴에 흰머리
가 많은 짧은 스포츠 머리였고 상의는  맑은 파란색의
반팔 난방에 흰색 면 반바지와 양말을 신지 않은 하얀
운동화 차림의 왜소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머리를 말
아 올린 탓인지 목이 길었고 날씬한 몸에 잘 어울리는
찰랑찰랑한  눈부신 하얀색의 실크 원피스에 특이하게
남자의 상의 색과 같은 파란 힐을 신고 있었다.  보기
드믄 고아한 미인형이었다  유리집의  3층은 주인들의
공간이었고  2층은 손님방들이었으며  1층은 연회장이
었다. 서로 오고 간 대화도 없었고 뭘 대접 받은 것도
없이 2층의 어느 한 손님방에 안내되어 이내 잠들었다
차가우면서도 매끄럽고 상쾌한 느낌에 눈을 떴다 주인
여자가 설명할수 없는 자세로 나에게 감겨있는데 놀랍
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얼마간 이었는지 깔
끔하면서도 감미로운 시간이 흘렀다 다른 부분을 원하
며 자세를 바꾸려는 나를 찔벅거려 그녀가 무표정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유리벽 밖에 남자가 서서 바라보
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은 분노나 절망 같은 감정 섞
여 있지 않았고 그저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에 급히 비켜서 있는 나에게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
다   그가 공허하게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죄책감이나 수치스러움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녀
가 있었고  그녀 또한 석상같이 무심한 표정과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 존재를 아예 의식하
지 않았다  나는 이내 그들만의 전쟁에 도구로 이용되
었다는 것을 알았고 죄스러움은 모멸감으로 분노로 바
뀌었다 빨리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옆을 스
치고 지나는데 뭔가 어색해서 다시보니 이상하게도 그
의 상의와 반바지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급히 그
유리 집에서 벗어나려는데  그때 응재 흥수 택주를 비
롯하여 여러 친구들이 들이닥친다. 1층 연회장은 금세
희귀한 음식으로 뷔페가 차려지고 어느새 내려온 주인
부부는 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맞는다.  나는 떠나지
못하고 진귀한 안주에 놀라며 브랜디를 무식하게 거푸
몇잔을 했다   이리저리 친구들 사이를 누비며 접대를
하던 주인여자가  내 곁을 스치며 '연락처 주세요.'라
고 나직이 속삭이며 멀어져간다 나는 아까의 모멸감이
나 분노는  어디로 가고 메모지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마침 어울리지 않게 음식 식탁 한쪽에  스피아민트 껌
이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겨있다 껌 겉종이를 뒤집어
전번을 적어  다시 싸서 껌을 주는 척  줘야겠다는 생
각을 했지만 이제는 펜이 없다 뭘로 적을까 궁리를 하
는데  다시  그녀가 다가왔다 손에는 희한하게도 목이
기역자로  구부러진 와인 잔을 들고 오는데 그 구부러
진 목에는 냅킨이 어설프게 감겨져 있었다. 그녀는 가
벼운 목례와 함께 나에게 건네준다.  친구들 사이에서
도 연신 잔을 권하는데 목이 구부러진 잔과 냅킨이 감
겨진 잔은 내 것 밖에 없었다  얼른 봐도 냅킨에 뭔가
가 적혀있었다 누가 볼세라 바지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만족감 안도감 술기운이 충만해진 나는 벽에 걸려있는
장식용 권총 두 자루를 들고 잔디밭 중앙에서 외친다.
'결투할 놈 나와!' 내심 주인이 나서기를 바랐지만 아
무도 응하지 않았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잔디 위에 총을 내던지고 유리성을 나선다.
밖에는 내가 타고 갈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이 매어져
있다 문득, 지갑이 없고 그 지갑은  2층 방에 두고 왔
다는 기억이 난다 가지러갈까?  생각하다가 멋지게 퇴
장했는데  다시 가는 것은 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자존심 상하지 않고  전화 할 구실이 생겨 더 좋지
않아?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냅킨을 꺼내 펴본다. 눈썹
그리는 펜으로  급히 쓴 듯 굵고  검은 숫자가 마방진
형태로 흘려져 쓰여 있다
098
665
464
이게 뭐지? 잠시 고민하는데 이때, 익숙하지만 듣기 역
겨운 음악소리가 강력하게 들린다.


5시 18분 알람소리에 잠을 깬다.
얼른 팬티를 만져봤다
고실고실하네 서 너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몽정은 안했네.
그럼 불륜도 없었군.
꿈이 너무 생생할 뿐더러 이렇게 줄거리가 있는 꿈은 처음이고
9개의 숫자가 너무 선명하다
나는 꿈을 자주 꾼다.
시리즈로 꿀 때도 있다
로마 병사가 되었다가 독립투사가 되기도 하고
간첩이 되어 북한도 넘어간다.
하지만 어떤 꿈이던
조각조각 단편적으로 꿀 뿐
오늘 같은 짜임새 있는 꿈은 아마 전무후무 할 것이다
잠이 깨고 한참이 지나 왜 응재와 흥수란 친구가 왜 나왔는지 알았고
숫자의 의미가 뭔지도 알았다
개는 나오지 않았지만 개꿈이다

 (2018. 7. 2~3 사이에 꾸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