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27 12:41
내 기억 속의 여자들(18화)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067  

18. 플라토닉 다방

'KHJ'

그녀는 내가 다니던 회사 바로 앞 지하 다방의 종업원이었다.
그때 말로 소위 다방레지였다
주인여자와 그녀 둘이서 운영을 했는데
주방, 서빙, 배달까지 해야 했으니 항상 정신이 없었다.
다방의 분위기를 설명하려면 우선 두 여자의 이력을 봐야한다
주인여자의 나이는 나보다 10여년 위였으니 30대 후반이었다
상당한 인텔리였고 미인이라기보다 깔끔하고 기품이 있었는데
고생의 흔적인지 눈 밑에 기미가 짙었지만 항상 쌩얼이었다
수원 부근에서 남편이 사업을 크게 했었는데 부도를 맞고 완전 빈털터리로
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로 도망치다시피 왔다는 말을 다방 개업하고 2~3년 뒤
서로 친해 졌을 때 남편과 같이 처음으로 식사하는 자리에서 들었다
남편은 다방에 잘 나오지 않았고 희멀건 백수였는데
각시에게 용돈 타다가 종일 기원에서 논다고 했다
한편, 그녀는 고향이 전남 광주인데 동갑내기 남친과 가출한 상태였다
남친네 집안은 광주에서 체인점이 여럿 있는 큰 제과점 아들이었는데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여 반항하느라 딸도 낳았으며
급기야는 세 살배기 딸은 언니네 에 맡기고 자수성가 한답시고 연고 없는
전주로 와서 그녀는 다방레지로 남친은 다른 다방 주방장으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만큼 그 다방은 그 시대에는 드물게 순수한 비즈니스 다방이었다.
대부분 레지들이 티켓장사하고 노인네들이 레지를 옆에 앉히고
다리를 주무르고 하는 여느 다방과는 달랐다
주인이 다방을 접고 식당을 차리기까지 근 5~6년을 둘이서만 꾸려나갔다
둘이 모두 성실하고 열심히들 살았다

그녀는 예뻤다
동양적인 마스크였는데 눈은 쌍꺼풀도 없는 은행눈이었고
코도 입도 하나씩 뜯어보면 조그맣고 볼품이 없었는데 전체적인 조화가 완벽했다
키도 아담해서 155~157 정도로 보였는데
저는 부득부득 160이라고 우겼다
그 당시 출근하면 업무 시작 전에 꼭 다방에 들렀고
점심때도 구내식당서 식사 후 거의 빼먹지 않고 다방을 들렀다
그러니 일요일 빼고는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을 갔다
업무상 손님을 만날 때도 거기서 봤으니 많이 갈 때는 하루에 대여섯 번 갈  때도 있었다
그러니 친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녀와 남친이 일을 시작한 전후 사정을 듣고는
안쓰러워 그녀의 남친과 내 각시도 동반하여 가끔 식사도 하며
연고도 없는 타지 생활을 위로 해주곤 했다
내 각시와 그들 셋은 모두 61년생 갑장이었다.
그녀의 남친도 나를 아주 좋아했으며 나도 친동생처럼 대했다
그런 상황이니 그녀와 나 사이는 플라토닉 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 신혼초인 내 각시를 끼워준 이유에 대해 지금도 나는 순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혹시 모르겠다.
나도 제어 할 수 없는 내 무의식에 숨어있는 음흉한 흑심이
그녀의 남친과 내 각시를 안심시키려  했는지는..
그리고 그 즈음 나는 신혼이었지만 혼전 복잡한 여자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부러 떠벌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데
그 다방에서는 그 누구와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니 그 정확한 저의를 나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사건이 있어서였는지,
왜 오기를 부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날 내가 동원 할 수 있는 여친 들을 총동원을 했다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오전에 3명 오후에 4명 총 7명을
그 다방에서 약속을 했다
마치 그녀에게  '너 아니면 내가 여자가 없는 줄 아냐?'고 시위나 하는 것처럼...
처음 한두 명 만날 때까지는 엽차를 갖다 놓고 주문을 받으면서
샐쭉하니  콧방귀 뀌듯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여자들이 계속 바뀌어 갈수록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어서 대여섯 번째인가?
6화(결혼 전야의 외도)에 나오는 'KSY'(가칭 김수연)이 나타났을 때가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키가 거의 170에 육박하면서 날씬했으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 시원스럽게 화려했다
다시 말해 외모와 체형이 자기와 정 반대였으며 평소 본인이 가지고 있던 핸디캡을
100% 커버하고도 남을 여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녀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다만 앞서 와는 다르게 주문도 받지 않고
주방 안에 있는 골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만 주의 깊게 봤다
사실 둘을 비교하면 어느 모로 보나 다방의 그녀가 훨씬 나았다
그녀는 내속을 알 리가 없지만...
'수연'은 쾌활하게 말을 건다.

"동주씨 장가가더니 사람이 많이 변했네. 대낮에 다방에서 만나자고도 하고...“

그 당시 나는 여자를 만나면 거의 저녁 술자리와 함께였으니 그렇게 말할 만 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는 별관심이 없고
골방으로 들어간 '해지'(가칭)에게만 온신경이 가 있었다.
주인여자는 아침부터 내 이상한 행동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고
그 여시 같은 여자가 내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헌데 '해지'가
골방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자 궁금했는지 주인여자가 들어가 본다.
좀 있다가 나온 그녀는 먼발치에서 손을 허리에 달랑 얹고는 아랫입술을 앙당물고
나를 흘겨본다!

'흐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군.'
나는 일단 만족했다

'수연'을 보내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데

"동주씨는 왜 '해지'를 울리고 그래“

주인여자가 걱정스럽게 말을 꺼낸다.
설마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투로...
나도 의외였다 (오잉? 울기까지?)

"내가 뭘... 알았어 앞으로도 두어 명 더 오기로 했는데 취소해야겠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녀와의 관계가 약 간 서먹해지긴 했지만
순수한 플라토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서로가 감지 할 수 있었다

이 즈음 나는 큰애를 낳았고 그녀의 남친은 광주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주에 있을 때보다 광주에 가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이 시기에 그녀와 만났던 10여년 동안 단 한 번의 잠자리와
단 한 번의 섹스(?)가 이루어졌다
여러 기억들이 뒤섞여 앞 뒤 정황이 명확히 정리되지는 않지만
3가지 정도는 뚜렷이 생각난다.
그녀와 덕진공원에 갔던 것,
어느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중 반찬들이 그득한 상위의 접시에
그녀가 정면으로 얼굴을 처박아 버린 것,
그리고 그녀와의 하룻밤인데
이 세 사건이 하루에 이루어진 것인지 각각 다른 날에 벌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와의 밤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방은 비키니 옷장과 밥상만한 앉은뱅이 화장대가 전부였고
비키니 옷장 옆에는 이불과 요가 정리되어 있었다.
초라했지만 청결해보였다
방 옆에 딸린 조막만한 부엌에는 세간살이 하나 없고
수도꼭지 밑에 붉은 고무양동이와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샤워를 해야 잘 수 있단다
물론 샤워는 각자 하지만...
잠자리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을 원했다
근데 특이한건 지금부터였다 지가 먼저 옷은 입지 말자 했으면서
정작 이불 속에서는
마치 남자의 손길을 처음 접해 보는 것처럼 닿자마자

"엄맛!"

하며 움칠거리거나 뿌리쳤다
몇 번을 그러길래 내가 확!  등을 돌려버리자
그때부터는 뒤에서 내 등을 콕콕 찌르며

"동주씨,  동주씨..."

부르면서 기어이 돌아눕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둘이 밀착되게 안기 까지는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껴안았다가 뿌리치고 돌아누웠다가 위로 올라탔다가 깔깔거리며
발밑으로 도망갔다가...
그날 우리는 거의 밤을 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섹스를 했느냐는 건데
일단 두 번 사정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히 삽입한 상태에서 사정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넣었는가 싶으면 획~ 틀어 빼버리고...
못 빠져나가게 엉덩이와 아래쪽 허벅지를 싸잡아 움켜 안으면
잠시 느끼는 듯 쌔근거리다가 내 손이 느슨해지면

"어마낫"

하고 또 틀어버린다
그러니 언제 어디에 사정했는지도 모르게 두 번이나 한 것이다

처음에는 새침을 내포한 그녀만의 유희 방식이려니 생각했는데
다시 곰곰 정리를 해보고
남친에 대한 억지스런 죄책감의 표출이라고 이해 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그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하룻밤을 보냈다

'우리의 사이는 플라토닉하지만 어딘가에 프로메테우스가 숨어있어'

라는 증명이나 하 듯
그리고 우리는 사심 없던 예전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뒤로 그 다방에서 여자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몇 년 후인가? 그녀가 남친과 헤어졌다는 걸 다방 주인에게 들었고
나는 모른 체했다
주인여자가 다방을 그만두자 그녀는 광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전주에 심심찮게 왔는데 올 때는 꼭 연락을 했다 
그녀의 딸이 고딩이 되었을 때인가?
일부러 딸을 데리고 와서 모녀에게 밥을 한번 사준적도 있다

핸드폰이 생긴 후에는 아무 때나 연락을 할 수 있어서 인지
오히려 서로 점점 멀어져갔다
나도 술이나 몽땅 취하면 전화로 헛소리나 지껄이고...
얼마 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라는 멘트를 들었다

뭔가 잘못 되었구나라는 생각은 했으나
크게 놀라거나 궁금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 자체가 내 기억속의 여자는 아니고 '김해지'가 있어야
설명이 되는 존재다
그녀는 '해지'의 동향 친구로 여우같고 꽃뱀 같은 여자였다
성은 기억이 나지 않고 이름이 '하영'이였는데
그게 본명이라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쉽게 돈을 벌려고 했고 실제 그녀 의도대로 흘러갔다
'해지'가 광주로 돌아갈 즈음에는 자기가 모았건, 어느 놈이 대줬건
오거리에 스탠드바 코너를 운영하고 있었다
'해지'와 연락이 끊긴 후에는 간간이 '하영'을 통해 단편적인 소식을 들었는데
진짜인지 거짓인지 좋은 소리는 한 적이 없다
화투판에 빠졌다는 둥 딸래미가 가출을 했다는 둥
살이 너무 쪄서 봐도 못 알아볼거라는 둥...
하긴 '해지' 남친이랑 우리 각시랑 모두 기족같이 지낼 때
'하영'은 몹시 우리를 부러워했다고...
그러니 '해지'가 잘못된 현재 상황을 꼬소롬하게 즐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가끔 '하영'의 스탠드바를 갔는데
'하영'은 은근히 지 자존심은 세운채로 나를 집적거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해지' 얘기를 꺼내며 딴청을 부렸다
거절의 명분은 '해지'에 대한 의리였지만
사실은 한다하는 수많은 소문난 술꾼들과
동서가 되기 싫어서 였다
'하영'은 계속 그 길로 갔고 어느 줄을 잡았는지
지금은 전주 어느 외곽에서 술카페를 하고 있단다.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겠지만 그리 보고 싶은 얼굴이 아니다

'해지'도 '하영'이도 거의 잊혀 갈 무렵
식당을 하는 다방 주인의 여자의 연락을 받고
중화산동의 어느 해물탕집에서 '해지'랑 셋이 만났다
진짜 살이 많이 쪘다 이쁜 얼굴에 살이 붙으니 귀티가 났다
하는 짓은 까불까불 하니 예전과 다름없었는데 깜짝 반가워하는
그녀의 눈에는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은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자기들 모임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나를 잠깐 불렀고
다방주인과는 돈 타는 계모임를 계속 해왔고
이번이 그녀가 탈 차례인 모양이다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동주씨 또 연락하게~"

하지만 서로 전번도 따지 않았다
이때가 그녀도 다방주인도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요즘 그 다방 부근을 거의 매일 지나다닌다.

그럴 때
간혹 저쪽에서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다
항상 출근시간에 쫓겨 머리도 못 말린 채
돔발돔발 뛰어 오는 그녀가...   *




'봄날'이라고 써있는 간판 아래가 지하다방의 입구였다



왼쪽 에어콘 실외기 옆이 다방의 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