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16 10:49
잿빛 11월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712  

2021. 11. 16(화)


1989년 11월 12일 새벽 2~3시경,
글쎄 날짜는 앞뒤로 하루쯤 틀릴 수도 있겠다.
저녁에 먹은 술이 초벌 깨고
변의에 화장실에 갈까 말까 망설이며
내 침대인 거실 소파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맛!"

낮지만 공포스런 외마디가 안방에서 들려왔다
'각시가 무슨 악몽을 꿨나?'
나는 무심히 안방 문을 열었다
나도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나 봤던 광경을 직접 본 것이다
세 살배기 아들놈이 눈을 허옇게 뒤집어 까고
팔다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뒤틀려 있는데
이 모습들이 뿌연 수면등에 비춰 괴기스러웠다
한마디로 '경끼'였다
전 날 애가 열이 난다며 걱정을 했었거든
우리는 지체 없이
가장 가까운 예수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이때 각시는 둘째 애 출산을 1달여 앞두고 있었다.
간신히 열은 내렸지만 원인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각시는 놀란 나머지 양수가 터져버렸고
급기야 둘째를 조기분만하게 되어
인큐베이터에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둘째의 생년월일이 891114이다)
졸지에 환자가 3명이 되어버렸다
막막했다
코앞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는 가정부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퇴원하는 일주일 동안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큰집과 연을 끊겠다고!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간병인 개념이 없을 때였다
급기야 궁여지책으로
'내 기억 속의 여자들' 9화의 주인공에게
구원요청을 하여 20여 일 동안 신세를 졌다
참고로 그녀는 쇼단에서 뱀춤 추는 스트립걸이였는데
전주공연을 돌다 나를 알아 쇼단에서 나와
전주에 눌러 앉은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해 썼던 부분을 잠시 가져 오면....


9. 뱀춤 추던 여인

'YKS'

1989년 11월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3살짜리 큰 놈이 열이 40도에 육박하며
경기(경끼)를 하는 바람에 종합병원 응급실을 갔는데
이때 둘 째 애를 가져 출산일이 아직
한 달이나 남은 애 엄마가 놀란 나머지 양수가 터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작은 놈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결과를 기다려야 했고 큰 놈의 병명은 오리무중 상태이고
애 엄마는 몸을 안정하고 추슬러야 할 터인데
불안과 걱정에 병실에 제대로 누워있지도 못했다
졸지에 나는 각기 다른 병실에 있는
세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버렸는데
설상가상으로 내가 다니던 회사는 하필이면 이 때
창사이래로 최대의 변신을 꾀하는 격변기에 있었고
그 중심축에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휴가는커녕 잠시라도 회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참으로 사고무친에 고립무원이었다.
그때는 간병인도 없었던 때이지만
있었다 해도 경제적으로나 퇴원한 후의
아이 엄마의 몸조리까지 생각하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게 그녀였다
그녀는 내 사정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응낙을 했다
다만 토를 단 한마디는

"에이씨, 블루블랙 염색하고 새로 파마했는데..."

병원에 나타난 그녀는
손톱을 자르고 매니큐어도 지우고
생얼에 머리를 틀어 묶었지만
키가 170이 넘고 눈썹에는 문신이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뱀춤을 추던 쇼걸,
그 당시 A급 빠순이(호스티스)였던 그녀는
어디를 봐도 파출부는 아니었다.
화류계 여자로서 그런 수모스러운 변신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너무 고마웠다
병원에서 4일, 퇴원해서 집에서 보름 정도?
도합 20여일을 아이 엄마에게 언니언니하면서
(그녀는 64년생으로 애 엄마보다 3살이 어렸다)
숙식을 같이 하며 무료봉사했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 올 때 걸었던 옵션이 있었는데
자기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지 마라는 거였다
물론 그것을 내가 지켰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녀의 노고를 생각하여 몇 번 어기지 않았다
술 먹고 들어간 때면 아이 엄마보다 그녀의 눈치가 보였으며
뒤통수에 따가운 눈빛을 느껴야했다
그녀가 집에 있는 동안 말 한마디,  
눈빛 한번 마주치지 않아서 아이 엄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그러기 이전에 처음부터 사촌누나가 소개했다고 말을 맞춰
안전장치를 해 놨었다
.......................
..........
후략~

나는 사주, 점, 미신 등을 잘 믿지 않지만
아주 잠시 11월을 불길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 놈이 7살 11월에 교통사고
(사실 교통사고도 아니지 뭐 지가 뛰다가 차에  부딪혔으니)로
다리가 골절 되어 병실에서 7살 생일 파티를 해줄 때였는데
문득, 왜 하필 11월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부인해 버렸다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무심코 넘어가지만 액운이 닥치면 우연도 꼭 필연 같이
하다못해 징크스처럼 엮으려한다
그런 틈새를 교묘한 통변으로 파고드는 게
상술 좋은 역술인들이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흘렀네.

낙엽도 거의 다 떨어져가는 스산한 11월에
묻어 두고 싶은 기억이 왜 갑자기 떠오른 거지?  에이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