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13 14:26
복중의 보신연가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500  

2022. 8. 13(토)


말복을 이틀 앞 둔 날이다

* 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시길......


최근 들어 애견 인구가 폭증을 하면서
동물병원 등 반려견 관련 업종들은 늘어가는 반면
보신탕집은 하나 둘 사라지거나 메뉴가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보다 윗 연배들은 보신탕을 '개국'  '개장국' 좀 더 점잖게는 '구탕'이라 했는데
70년대를 지나면서 '보신탕'으로 정착되었다
그 당시도 아마 식사 메뉴에 '개'자가 들어가는 걸 좀 꺼려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암튼 개를 예뻐하면서도 보신탕을 무지 좋아하는 입장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보신 식문화를 아쉬워하며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내가 언제부터 보신탕을 먹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선친께서는 드시지 않았으니
어렸을 때 집에서부터 먹었을 리는 없고 대강 고딩 후반부 정도였을 것이다
나의 개에 대한 엽기적인 에피소드는 부풀려지고 덧붙여져
친구들 간에 술안주로 씹혀지곤 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떠올려 보자면,


고딩을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학교가 가기 싫어 휴학계를 내고
군대 먼저 갔다 온다며 대기하고 있던 시기였으니 20살 전후였을 것이다
진안 마령에 선친께서 약45만평의 임야에 식수와 조림, 표고 재배 등
여러 사업을 벌리고 계셨던 터라 산에 산지기 부부도 상주하고 있었고
나도 전주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산에 있었다.
어느 날 산지기 개가 새끼를 6마리를 낳았는데 아침에 볼 일이 있어 전주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새끼가 4마리밖에 없는 게 아닌가!

"아줌마! 새끼 2마리 어디 있대요?"

"죽어서 은희아부지가 어디다 묻었디야"

"아이고 그걸 왜 묻어요"

산지기 아저씨에게 묻은 곳을 물어봐서 다시 캐다가 내장만 긁어내고
끓여 먹었는데 2마리지만 막 낳은 새끼라서 라면 1개 끓이는 냄비로 딱 맞았다
또 한 사건은 시기는 거의 그 즈음이었고,
우리 집에는 정원이 있었는데 선친께서 스피츠를 한 마리 키우셨다
그런데 그 스피츠가 정원을 자꾸 파헤치는 버릇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새로 심은 꽃나무를 파서 죽여 버렸다 그것을 보신 어머니가

"저놈의 개 누구 줘버리든지 해버려라"

그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끌고나와 잡아먹어버렸고
개밥을 주며 예뻐했던 가정부아주머니는 화를 속으로 참고 있다가
선친께서

"쫑 어디 갔냐? 쫑이 안 보인다?" 하며 찾으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주가 잡아먹어버렸대요"

그러자 선친께서는

"그놈의 자식은 배고프면 지 에미애비도 잡아 처 먹을 놈 아녀?"

하시며 노발대발 하셨는데 이 이야기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
내가 쫑을 데려다가 직접 잡아먹은 게 아니고
지금의 동서학동 무궁화탕 맞은편에 자주 가던 보신탕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갖다 주고 수육하고 바꿔 먹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잡아먹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다
나는 그 후 직장을 다니면서도 내 주도로 개를 수없이 잡았지만
직접 배를 가르고 닦달하는 것은 할 줄도 모르고 해본적도 없다
또 다른 사건은 군 생활을 할 때였다
부대 내 B.O.Q(장교숙소)에 세퍼트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개도 밉상이거니와 개 주인인 대대장도 아주 진상이었다.
나는 그때 위병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직속상관도 아니고
위병소 업무와 관계도 없으면서 우리를 사사건건 괴롭혔다
어느 여름 대대장이 휴가 간 틈을 타서 그 세퍼트를 까버렸다
위병소에 근무하니 영외출입이 자유로워 끌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고
부대 밖 외딴 민가가 있었는데 그 집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
그 집에서 잡고 요리도 다 해줬다
그때 중요한건 철저한 보안이었는데 우리 위병소 대원들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켜졌다
개줄은 제자리에 다시 뒀는데 저절로 빠져나간 것처럼
목줄을 동그랗게 고리를 끼운 채 놔두었다
그때 좀 미안했던건 개를 돌보는 취사병들이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대대장에게 우박을 맞았다
그 사건으로 4개포대(중대)가 3개월 외출외박 금지명령이 떨어졌는데
1달도 못되어 해제되었고
나중에 사병들 간에는 공개된 비밀로 전설같이 떠돌았다


제대하고 복학해서도 학교 쓰레기장에 들어오는 개들을 잡아먹는 등
시망스런 짓을 많이 했다 
복학했을 때 브리샤 종류인 k303을 타고 다녔는데
일주일에 2번 정도는 혼자서 점심에 보신탕을 먹으러 시내로 나왔다
그때 보신탕집 밀집지역이 한성여관 뒷골목이었는데
내 단골인 '충일옥'을 비롯하여 '고창집' '대우집' 등이 있었다.
충일옥이 단골이 된 이유는
소주를 시키면 서비스로 조그만 접시에 삶은 창자와 갈비를 줬고
또 카운터를 보는 주인 딸이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는데
간혹 한가할 때면 서비스 접시에 수육을 한두 점 추가로 슬며시 놓아주곤 했기 때문이다
88올림픽 전후로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보신탕집들은 지금의 우아2동 주민 센터 맞은편 안덕원 지역으로 옮겨갔고
거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6지구와 아중 1,2지구가 개발되면서 흩어지고 없어졌다
그 당시 동부우회도로변 지금의 신세계 아파트 맞은편에 새로 자리 잡은 '원집'을 그 뒤로
자주 갔었는데 주인아저씨는 한량으로 늘 사냥이나 탐석(수석수집)을 하러 다녔고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주방을 봤는데 나는 갈 때마다 식구통으로 아는 체를 하면
아껴놨는지 싱(꼬추)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 즈음 전주에 먹을 만한 보신탕집으로는
35사단 뒤(지금의 에코시티 소망교회부근)의 '대성집', 동적골에 있는 '부용집', 남부시장의 '청파식당',
그 유명한 오수 신포집이 가족에게 분점을 내준 아중리의 '오수신포집' 등이 있었다.
오수신포집의 특징은 대부분의 보신탕집의 메뉴는 보신탕과 삼계탕 2가지였는데 
여기는 생뚱맞게 구워져서 나오는 '소불갈비'가 있었고 의외로 인기가 좋아
보신탕을 먹지 않는 사람들도 일부러 불갈비를 먹으러 오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이 밖에도 전주에 보신탕집은 수없이 많았겠으나
내가 주로 다녔던 곳은 이 정도였다

내가 보신탕 얘기를 하다보면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등산모임에서 알게 된 후배인데 고향이 충남 서천이다
서천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보신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일 것이다
젯상에도 올라가고 혼인 때도 개를 잡는다고 했다
내가 개를 예뻐하기도 하거니와 보신탕도 좋아하지만
이 후배는 나보다 500배는 더 이뻐하고 더 잘 먹는다
그에 대한 어릴 적 이야기가 있다

초딩때 학교를 갔다 오면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오는 친구같은 누렁이가 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누렁이가 마중도 나오지 않고 보이질 않더란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할아버지가 솥에 넣고 삶아버렸다고...
그날 저녁 그 후배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기를 먹었단다.
그래도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2015. 10. 23 부용집에서...   저 친구가 그 주인공이다


예전 시골에서는 복날이 되면 개를 잡긴 했어도
자기들이 키운 걸 직접 먹지는 않고 옆집과 바꿔 먹었는데
할아버지는 너무 하셨지(그게 그건가?)

나는 직장생활 2~3년이 지나면서 신입사원 틀을 벗자마자
매년 여름이면 주도해서 개를 잡았다
책임자급이 되었을 때는 본격적인 여름 연례행사로 굳히게 되었는데
일단 7월초면 회비부터 걷었다
우리회사는 6월 결산법인이라서 결산이 끝나고
7월초에 보너스와 여름휴가비등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직급에 따라 차등을 두었고 평사원과 기술직은 받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회사 본 지점 전 직원이 120여명 정도 되었고
임원과 부장급, 여직원을 빼면 해당 직원이 50여명 쯤 되는데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참석 인원이 많을 때는 30여명, 적어도 20명은 모였으니
적은 규모의 행사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시절 전국적으로 제조, 생산직은 물론이고 화이트칼라직까지
노조설립열풍이 불던 때라서 직원들이 너덧 명만 모여도 경영진에서는 긴장을 하며
감시를 하였는데 내가 노조를 워낙 싫어한다는 걸 위에서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직접 금전적으로는 아니어도 회사차량까지는 지원을 해줬다
D데이는 7월 하순에서 8월초사이 직원들이 가장 많이 참석 할 수 있는
일요일(그 당시는 토요일이 휴무가 아니었다)로 잡았고
장소는 거의 소양 일임리 들어가는 단암사 다리 밑이었다.
당일에는 새벽부터 분주했다 동원 가능한 직원들, 거의가 총각 쫄병 사원들 이었는데
맨 먼저 하는 일은 자리 잡기와 얼음 채우기다
전 날 사 놓은 술과 음료 주전부리 감을 큰 아이스박스에 담아 다리로 가서
제일 좋은 위치의 평상을 선점해서 두 명 정도를 보초로 지키게 하고
남부시장 그릇 집에서 솥과 식기, 가스버너등을 빌리고 얼음덩어리를 산 다음
다리로 돌아와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물과 술, 음료를 채우면 제일 중요한 일은 끝난다.
이때의 시간이 대강 아침 7시 전후이다


현재의 단암사 다리이다


지금부터는 여유가 있다
양념류는 구내식당 아주머니가 밑반찬과 더불어 이미 준비를 해놔서
회사 식당에서 실어오면 되고 메인인 개고기는 이미 2~3일 전에 점 찍어놔서
가서 잡는 것 확인하고 가져오면 된다.
처음 개고기를 대주던 곳은 지금의 남부시장 성원오피스텔 부근의 선배가 소개해 준 곳인데
잡아 주기도하고 잡아 놓은 통개를 팔기도 했다 몇 번 거래를 잘 했는데
어느 해인가 먹지 못할 정도로 너무 질겨서 실패한 뒤로는 다른 데로 바꿨다
이동교 옆 지금 시티병원 천 건너 맞은편 연립주택이 들어선 자리인데
그때는 밭이 있고 과수원이 있는 한쪽 공터에 개장들이 즐비하고
항상 20~30마리 이상은 확보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  가건물 창고가 있고 거기가 잡는 작업장이었다.
처음 가서 잡는 광경을 봤는데 너무 간결했다 생물이 고기로 변해 정리되는 게
불과 15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기가 남부시장 예전 남부배차장 부근으로 개나 고양이 등 동물들이 거래되던곳이었고

지하에는 개를 잡는 작업장과 잡아진 개 통마리가 들어 있는 냉동고도 있었다

아직 흔적이 있네.....


내가 처음 개 잡는 것을 본 것은 초등 때였다
우리 동네에 미싱(재봉틀)수리하는 집이 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투망전문가였고
나를 무척이나 이뻐했다
전주에 경찰국장이나 사단장, 보안대장 등이 새로 부임해 오면
선친께서는 그 아저씨를 동원해 이벤트 행사로 봉동이나 고산으로 투망질을 갔는데
잡는 방법이나 고기의 크기와 양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총도 잘 쐈다 겨울이면 선친의 총을 빌려 간혹 나도 데리고 사냥을 갔는데
유독 그 아저씨에게만 총을 빌려줬다
그 이유는 총을 돌려줄 때 거의 빈손일 때가 없고
꿩이나 토끼 등을 가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아저씨가 어느 여름날 짐빠(짐자전거) 앞에 나를 옆으로 걸터앉게 태우고
뒤 철망 안에는 개 한 마리와 가마니 등 이것저것 담은 채 어디론가 향했다 
바로 그 유명한 '색장리 다리'였다
그 당시 한해 여름이면 그 다리에서 죽어가는 개가 수십 마리에 달했을 것이다
전주 시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외지고 수량도 많아 요지였다
다리 위에 도착한 아저씨는 먼저 삐삐선(까맣고 가느다란 군 통신선으로 여간해서 끊어지지 않아
끈이 귀했던 그 시절 빨랫줄로 많이 사용했다)을 꺼내서 한쪽을 다리 난간에 묶었다
그리고 다리 높이를 익히 아는 듯 다른 한 쪽은 팔과 가슴으로 한발 정도 길이를 잰 다음
올무를 만들어 개목에 걸고 주저 없이 다리 난간 밑으로 던져버린다
줄이 당겨지는 '촥~' 소리는 났지만 목이 졸려져서 그런지 끽 소리도 없다
다만 줄이 요동치는걸 보면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는 느긋이 담배를 한대 태려 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뒤 철망을 통째 들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개는 축 늘어져 있었지만 완전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각목을 집어든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늘어져 있는 개를 투덕투덕 팼다
때릴 때마다 움찔움찔 했는데 아직 살아있어 반응을 한 건지
때리는 충격에 의한 흔들림이었는지 분간이 안 갔다

"개는 패서 잡어야 살에 피가 배어 맛난거여"

같은 이치로 차에 치어 죽은 개가 맛나단다
그래서 '복날에 개 패 듯하다'는 속담이 생겨났으리라

한참 뒤 삐삐선에 매단 채로 짚을 뭉쳐 다리사이사이에 끼워넣고
가마니로 몸을 돌려 쌌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토치가 없던 그 시절 털 꼬슬르는 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이었다.
불이 세면 껍질이 익거나 벗겨져버리니 짚에 불이 확~ 붙지 않고 몽골몽골 타게 해야 했다
그때 타면서 풍겼던 누린내, 낸내 등 고약한 냄새는
지금 현재까지도 그와 비슷한 냄새가 나면 바로 그때가 연상된다.
가마니가 다 꼬실라지자 그제야 끌어내려 대나무 칼로 꼼꼼하게 탄 털을 밀었다
다음 단계는 홀라당 벗겨진 몸뚱이를 반쯤 물에 잠기게 하고
지푸라기를 뭉쳐서 때수건 삼아 물에 적셔가며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까지 했어도 때깔은 거무튀튀했다
배를 가른 아저씨는 김이 나는 간부터 찾아 꺼내들었다
엄지손톱만큼 떼어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저씨는 자기 입에 넣고 추가로 간의 절반을 더 베어 물고는

"생간은 개간이 최고여 들큰한 맛이 아주 그만이여"

내가 생간을 먹은 때는 그로부터 10여년 뒤였고
저 멘트는 지금도 내가 써먹는 멘트가 되어버렸다
간을 마저 드신 후 본격적으로 내장 정리에 들어갔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친이 사냥을 해 온 토끼나 꿩 등을
우리 집 정원 수돗가에서 배 가르고 잡는 모습을 많이 봐와서
내장 정리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만 좀 다른 것은 집에서 잡았을 때는 내장을 거의 버렸는데
개 내장은 씻은 다음 다시 다 담았다
비닐이나 비료포대가 없던 시절이라 일명 '회푸대종이'(지금 시멘트 포대로 이해하면 됨)로
여러 겹 쌌다 몸통은 목을 잘라내고 각 다리를 하나씩 4등분을 했다
모두 끝났을 때는 점심때가 지나있었다 
아침 먹고 왔으니 꼬박 한나절이 걸린 것이다
내가 10살 전후였으니 196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고
앞에서 썼던 내 엽기행각은 이때부터 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많은 색장리 다리

여기에 '견혼비'라도 하나 세워야하지 않을까?


지금은 확장되어 증개축된 다리

저 다리 밑에서 수많은 개들이 잡아 졌다


예전이지만 이렇게 개를 잡는데 거의 한나절씩 걸렸고
나중에 남부시장에서도 산 개를 맡기면 빨라야 두어 시간이었는데
15분 만에 끝나다니...
잡는 초식을 보자면,
두 명이 달려들어 한 마리 들어가면 딱 맞을 철망에 개를 넣고
집게 달린 전선을 철망 아무 곳에 물린 다음
다른 극에 연결된 기다란 꼬챙이를 철망에 넣어 개 몸에 대자
'파짓!' 하며 1초도 안되어 털썩 쓰러져버린다 쉽게 말하면 감전사다
끄집어내 화염방사기 같은 걸로 쏘아대며 두어 번 뒤집고
세차하는 고압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넙적한 솔로 돌려가며 몇 번 벅벅 문지르자
깨끗한 알몸이 된다.
이어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닳고 닳은 깨때기칼로 거침없이 배를 가른다.
내장을 바닥에 쏟아 놓고 위와 창자를 순식간에 뒤집어 오물을 제거하고는
배 안쪽도 호스를 넣어 개운하게 씻어 낸 다음
다시 내장을 모두 배속으로 집어넣고 저울에 올린다.
이것이 개를 '산피'로 다는 방법이다
여기서 좀 모순된 이중 잣대가 등장한다.
내가 선호하는 근대(무게)는 30근 전후이다 킬로로 환산하면 18키로니까
근당 600그램이란 얘기다 산피로 근당 5천원이라면 총금액이 15만이다
소나 돼지도 600그램이 한 근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시장에 가서
개고기를 무게를 달아서 산다면 이때는 400그램이 한 근이다
그것도 뼈가 다 포함된 상태로...
이것에 대해 자세히 말하려면 이야기가 한참 다른 데로 빠져야하니 생략하자


현재도 남부시장에 있는 개고기집

여기서 낱근으로 사면 뼈가 불은 채로 1근에 400그램을 준다


무게를 달아 금액을 확정하면 개장수가 묻는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내 주문은 대부분 비슷하다

"목은 바싹 자르고 4등분에 내복은 간과 콩팥만 주세요".

여기서 '목은 바싹  자르고'라는 주문에 의미가 좀 있다
머리를 누가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바싹‘ '적당히' '목살 좀 붙여서' 이렇게 달라진다.
‘바싹’과 ‘살 좀 붙여서’는 목 살 한 근 차이는 난다
머리를 단골로 가져가는 사람들은 행사에 참석 안하는 간부급들이었는데
이런저런 약초를 넣고 고아서 시골 부모님 약  해드린다고 했었다
찬조를 얼마나 했느냐와 그때그때 내 기분에 따라 위의 세 옵션은 달라졌는데
머리를 가져가는 당사자들은 전혀 몰랐다

미리 준비된 비닐 깔린 박스에 네 다리와 내복 따로 머리 따로 담은 검정비닐봉지를 같이 넣고
박스를 쌍십자로 묶으니 끝이다
개가 작업장으로 끌려 들어오고 지금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이다
그날 이후로는 개가 필요하면 미리 예약할 것도 없이 바로 가면 되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개 종류가 거의 도사견 등 대형견과 믹스견들이었다
만약 순수한 토종 똥개가 있으면(딱 한 번 똥개를 산적이 있었다)
그건 산피로 달아서 파는 게 아니라 그냥 눈대중으로 가격을 매겼다
산피의 2배 이상 비쌌다


이동교 개천 건너 재개발 하려고 흰 팬스가 쳐진, 그 안 3동의 핑크빛 연립자리가

개 농장 자리이다


고기를 찾아오면서 개고기를 못 먹는 직원들을 위해 백숙용 닭을 3마리정도 사고
회사 기술직 용원인 전삼동 아저씨를 픽업하여 다리 밑으로 간다.
아저씨의 역할은 중요했다 요리를 다 할뿐더러 나중에 뒤치다꺼리도 모두 도맡았는데
수고비를 넉넉히 챙겨주니 만족해했다
개고기도 좋아했는데 안 먹는 이유가 각시가 신끼가 있는데 한 첨만 먹고 들어가도
귀신같이 알아 난리를 친단다.
아저씨가 퇴직한 후에는 이씨간장집 인력센터에서 아주머니를 일당잽이로 썼다
다리 밑에는 아직 솥으로 고기도 안 들어갔는데
맥주를 까며 빤스바람으로 고스돕판이 벌어졌다(이래서 여직원들이 참석을 못한다)
양념과 재료 등은 식당아주머니가 다 준비를 해줬지만 아저씨도 나름 요리 솜씨가 있었다.
술판과 물놀이를 번갈아 하다보면 술이 취할 틈이 없이 시간이 간다.
나는 탕이나 다른 부위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배받이살만 먹는다.
이 배받이살이 보신탕집에서 수육으로 나오는 껍질 있고 기름 있고 살 있는
삼겹같은 부위이다 제대로 하는 보신탕집은 이 부위가 없으면
수육을 손님이 찾아도 떨어졌다고 팔지 않는다.

언젠가 한참 혈기왕성할 때 안양에서 동생들과 보신탕집을 갔었다
손님들이 제법 있는걸 보니 꽤나 하는 집 같았다
수육을 시켰는데 바닥에 부추를 깔고 째는 냈는데 배받이살이 아니고
퍼벅살 덩어리를 가져온 것이다
주인을 불러 따졌더니 도리어 나를 이상하게 본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상들을 보니 수육상은 모두 우리와 같았다
그날 거기서 큰소리로 난리를 낸 뒤로는
내 동생들은 내가 올라가면 절대 밖에서 안 먹고 시켜 먹는다.


2014. 4. 17 부용집 수육  이게 최상급 수육이다


2020. 4. 5  동상집 수욱....  이렇게 껍질, 기름층 살이 켜켜이 있어야 수육이다

하지만 이것은 위의 부용집 수육에 비해 엄청 큰 개이다 당연히 상급은 아니다


개판은 오후 3시경이 되어야 끝이 난다
몇몇은 전주로 들어와 2차를 가고 골수 고스돕 멤버들은 여관을 잡는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돈이 항상 남지만 나중에 회비 내고 참석 못한 직원들
모닥모닥 해서 한잔하면 결국에는 내 돈이 더 들어간다.
돈이 남건 모자라건 내가 주관하는 동안 회비 가지고 왈가왈부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리 밑에서 개 먹는 행사는 십 수 년을 계속하다가 
내가 퇴직하기 3~4년 전부터인가?
다리 밑에서 구내식당으로 옮겨왔다
물놀이와 고스돕판이 없어진 대신 간부급들과 여직원들이 참석하게 되었으니
인원은 대폭 늘어났다 시간도 일요일에서 금요일 저녁으로 변경되었고
거의 모든 것을 식당아주머니가 떠맡았는데
그때도 회비 걷는 것(다른 사람이 걷으면 잘 안 걷힌다고)과 개 잡아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개를 선택하는 두 가지 원칙이 생겼다
하나는 산피로 30근(18키로) 이하여야하고 맥시멈 20키로 까지는 인정, 
또 하나는 햇개가 아니어야한다는 것이다
토종 똥개가 믹스되면 30근 이상까지 크기가 어렵고
햇개는 겨울을 한 번도 나지 않은 개를 말하는데 마치 설익은 풋과일을 먹는 것처럼
짙은 맛이 없다
내가 퇴직한 뒤로는 개모임은 지속되지 않았다 한다.

내가 가장 최근에 보신탕을 먹은 게 22년 5월 21일이다
아들놈 혼사 뒤풀이에 빠진 친구가 워낙 보신탕을 좋아하여 겸사겸사 둘이서만 갔다
전주 삼천동에 있는 '평양옥'으로 생긴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아
언제 가봐야지 하며 벼르던 곳이다


건물은 근사하네......


한창 점심시간인데도 혼자서 먹는 두 테이블뿐이다
대접 성격으로 봐서는 수육이라도 한 접시 시켜야하는데 일단 검증이 안 된데다가
친구가 술을 전혀 못해 수육은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쳐서 그냥 탕만 시켰다
최근 한다하는 집들도 주종을 보신에서 흑염소로 바꾸는 마당에 이 집은 꿋꿋이  
보신을 고집하고 있어 내심 기대를 많이 했었다
결과는?
웬걸 이렇게 맛없는 보신탕은 처음이다
특유의 향과 맛이 전혀 없다 친구도 같은 생각이다
서로 마주 보며 어이없어 웃었다
다시 안 오면 되지 머


아직 숟가락을 넣기 전....  

이때까지는 잔뜩 기대를 하며 친구 입가에 굴풋한 미소가 흘렀는데....


전주에 보신탕집들이 하나 둘 없어지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남아 있는 집들도 손님이 줄어드니 고기회전이 되지 않아 질이 떨어지고 
손님도 떨어지고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부용집이 그랬고 동상집이 그랬다



2017. 5. 12  부용집,  최근에는  저 간판을 완전히 바꿨다



동상집은 큰간판은 흑염소로 바꿔버리고 보신탕도 빼고 영양탕으로 변장했다


이제 내가 예전에 가 본 공식적으로 남은 곳은
평화동에 오수신포집과 서신동에 황토집 뿐인가? 
나 같은 사람도 보신탕집 가는 빈도가 이렇게 떨어졌는데
우리 세대가 지나가면 과연 보신문화가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입에 침이 고여 얼마나 삼켰는지...



아직 기개를 걸어보는 신포집과 황토집


이 8월이 가기 전에 평화동과 서신동을 꼭 한 번씩 가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