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6-22 13:28
전주 한옥칠경과 나의 옛 시절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84  
2023. 6. 22(목)


한옥칠경과 나의 옛 시절

지각없는 일부 전주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한옥마을 뭐 볼 것이 있다고 오는가 모르것어"

심지어 볼 게 없어도 지어내서라도 자랑해야하는 관광 일선의 택시기사 마저도 한옥마을 가는 
관광객을 태우고 저런 말을 내뱉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을 튀기며 설명을 한다.

'우리가 태어 날 때부터 거기 있었고 늘 곁에 두고 살아와서 그 소중함과 가치를 모르고 있지
만 한옥마을이 이렇게라도 성공(2022년 통계 카카오네비 전국 검색순위 1위 전주한옥마을)한 
이유는 경기전, 풍남문, 전동성당 같은 든든한 유, 사적이 기반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여..'
이렇게 시작하여 살을 붙여 나간다.

지난해(2022) 8월 전동성당이 2년간의 보존수리를 마치고 참하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 성
당에 대한 이런저런 느낌을 썼었다 근데 쓰는 도중 주변 경기전과 남문에 대한 어릴 적 기
억이 떠올라 그것에 대해서도 써보자 했는데 쓰려던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 맘먹고
끄적거리려다 보니 아무래도 내 유소청년기를 한옥마을 부근에서 보낸 터라 경기전, 남문, 
전동성당 말고도 한옥마을 안팎에 자리해 있는 한벽당이랄지 오목대 등등 기억의 폭이 점점 커 진다 
그래서 이참에 주섬주섬 싸잡아 정리를 한 번 해봐야겠다.

1.경기전
2.풍남문
3.전동성당
4.오목대
5.한벽당
6.전주향교 
7.학인당

순서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건 아니지만 나름 생각하는 것이 있긴 하다
제목도 '한옥칠우' '한옥칠보' 등 고민하다가 일반적이고 알기 쉽게 그냥 
'한옥칠경'으로 해본다
각 유적지들의 일반적인 설명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세세하게 나와 있으니 나는 나와 
관련된 사연들과 사적인 의견을 써보려 한다.



현재의 한옥마을이다

맨 위의 '객주'는 내 단골 술집이다





1980년대의 한옥마을이다
한벽당과 향교, 학인당은 사진 밖에 있다

이때 경기전을 보면 중앙초교의 남동쪽 귀퉁이에 붙어 있다



1. 경기전 






현재의 사진이다 1930년대 사진과 비교해 보면 하마비의 방향이 바뀌어 있고
하마비와 홍살문의 간격 차이가 많이 난다




우측 행인 2명이 걸어가는 자리는 안 쪽으로 중앙초교 3층 건물이 있었고
5학년 때 나의 교실도 있었다


지금의 경기전은 내 어릴 적(1960년대)의 경기전 보다 단순 면적은 5배 정도 커졌지만 내, 외
형 가치는 300배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가상승률을 적용하지 않고도 한옥마을 땅값 
자체가 100배는 올랐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국민들의 높아진 문화적 인식도를 적용하면 500배
라 해도 할 말 없겠지  
1960년대 중반, 초등 저학년 때 그곳은 우리 놀이터였다 담도 문도 아주 허술했고 우리는 잘 
들어가 보지 않는 안 쪽에 어진이 있는 정전과 실록각, 그리고 허름한 고가가 두어 채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의 경기전이라는 곳은 넓은 중앙초등학교 한쪽 구석에 사글세 사는 신세였다고
나 할까? 한마디로 몰락한 왕조의 비애였다 조선왕조가 일제에 이씨조선이라 폄하 당하며 짓
밟히지 않았다면 태조의 초상화가 모셔져있는 곳이 그렇게 방치되었겠는가.
우리의 주놀이터는 홍살문 부근이었고 '빵울치기'를 하며 놀았는데 빵울치기는 야구 룰과 비
슷한데 일단 배트나 글러브 등 도구가 필요 없고 물렁한 고무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 
타자는 주먹을 배트 삼아 치고 뛰면 되는데 수비는 터치하여 아웃시켜도 되고 뛰는 주자에게 
공을 던져 몸 아무 곳이나 맞춰도 아웃된다.
홍살문 가운데가 홈베이스였다



저 홍살문 밑이 우리 야구장이었다


우리가 뛰놀던 그 시기가 어쩌면 경기전 역사상 가장 피폐해져 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일제강점기의 훼손과 방치에 이어 해방되고 채 안정되기도 전에 6.25가 발발했지, 전후에는 
4.19에 5.16에 민관군 어느 누구도 문화재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70년대 초 내가 중학교를 들어갈 즈음에야 성심여중고 사거리 방향으로 정문다운 정문이 생
기고 담이 정비되었다
그 때 경기전에서 몇 년 전에 죽은 KL이라는 친구와 야밤에 둘이서 맞짱을 뛰게 되었다 
그 친구가 자전거 체인을 숨겨와 휘둘렀는데 내가 막으려다 내 팔에 감겨버렸고 그 친구는 손
에 쥐고 있는 반면 나는 내 팔에 감기니 체인을 나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키도 작고 왜소했지만 아구똥한 친구였는데 체인을 빼앗기니 바로 튀고 말았다 그 뒤로 다시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같은 모임까지 하면서도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은 사후 몇 개월 뒤에 들었는데 짠~한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겠지
경기전은 그 후로 1990년대 중반 중앙초등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학교 부지를 몽땅 
흡수한 뒤 여러 고증을 통해 불탄 옛 건물들을 복원, 증개축 한 것은 물론 더 확장하여 지금
과 같이 뿌듯한 유적지가 되어 한옥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2. 풍남문 

60~70년대의 풍남문은 딸랑 성채 하나뿐이었다 옆 날개나 앞뒤의 살점도 전혀 없었고 성문으
로 리어커나 사람들이 통행도 했었다 철없던 시절 포장마차에서 얼큰하게 취하면 성곽에 올라
가 고성방가에 아래로 소변도 갈겼다
전동 토박이에 남부시장이 놀던 나와바리니 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
저 때의 성곽은 달려가서 파파박~~ 집고 뛰면 위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뒤쪽으로 오목하게 용머리고개가 보인다




주변에 살이 붙은 현재의 풍남문




1967년 성 밖에서 본 풍남문
오른쪽의 '태풍거'는 그 당시 유명했던 중국집이다


코로나 사태가 나기 전에는 12월31일이면 풍남문에서 시도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야의 행사도 
열리곤 했었지 
그런데 풍남문에 대해 예전부터 품어 오던 의문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우리가 중국의 어느 지역을 떠돈다고 가정해보자 길을 따라 가다보니 멀리 성
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성에 걸린 현판을 보는데 '항주성' 이라 쓰여 있는 게 옳을까 '남문'이라 쓰여 있
는 게 옳을까 내 생각엔 항주성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동문 서문 등 방위는 성 안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거 아닌가? 전주 서학동쪽에서 보면 남문이
건 동문이건 모두 북쪽에 있고 팔복동 방향에서 보면 북문이나 서문이나 모두 남쪽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주의 풍남문을 보면 옛 사진이나 지금 사진이나 성 밖에서 보면 '풍남문' 성 안에서 
보면 '호남제일성'이라고 쓰여 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성 안쪽에서 본 모습 '호남제일성'이라고 쓰여 있다



3. 전동성당 

전동성당에 대한 가장 오래된 내 첫 번째 기억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시기와 겹치니까 
1963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 사이였던 것 같다
그때 전동성당 피뢰침 설치 공사를 했는데 주변에서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지은지 30년이 넘드락 벼락이 한 번도 안때렸디야"

"긍게 훨씬 낮은 저 회화나무도 맻번이나 맞았다든디"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개벼"

그때는 전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1960년대 전후의 전동성당, 좌우에 사제관과 풍남문이 보인다




2022년 8월 보존수리를 마친 전동성당, 앞쪽의 사제관은 지어진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전동성당 안에 친구가 살았었다 사람들은 친구의 부친을 '복사님'이라 불렀는데 
쉽게 말하면 성당 관리인이었다. 
그 당시는 성당 종탑에 실제 종이 있었고 정오와 오전 오후 6시(?) 세 번(?) 종을 쳤는데 종치
기도 복사님 담당이었다.
친구의 어머님은 상당한 미인에다 대건신협 창립 직원 중 한 명이었는데 대건신협은 팔달로변
으로 정문이 나 있었고 본체는 성당 안에 있었다. 두 분은 슬하에 3남4녀를 두고 자식 중 신
부님이 나오기를 학수고대 했는데 내 친구가 그 소원을 이뤄드렸다
내 친구와 나는 성당 구석구석을 고망쥐 처럼 뒤지고 다녔었다 
박쥐 본다고 먼지가 수북한 성당 천정 서까래를 기어 다녔고 
부서진 성모상이나 고상(예수님 매달린 십자가) 등은 아무데나 버리지 못하니 지하 한쪽에 모
아놨는데 그게 깜깜한 데서 보면  싸아~  하고  섬뜩하니 그 맛에 심심하면 들랑거렸다  
성당 제단 뒤에는 신부님이 미사 준비하는 사제실이 있었는데 거기도 몰래 들어가 영성체 할
때 신부님이 신도들 입에 '그리스도의 몸!' 하며 넣어 주던 아무 맛탱가리도 없는 동그랗고 하
얀 밀떡을 훔쳐 먹으며 서로 낄낄대기도 했다
성당의 뒤편에는 수녀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거기도 프리패스였다 

고2 때였던가?
그 친구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수녀원의 복희와 장래를 약속했다고...
'그게 먼말이여?'
수녀원에는 우리 또래의 심부름이나 잡일을 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직접 말은 안 해봤고 오래 성당을 드나들다보니 낯이 익어 서로 눈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그때 친구 집에는 TV가 없어 수녀원으로 한국과 말레이시아 축구를 보러 갔는데 마침 수녀님
들은 한 분도 안계시고 복희만 있더라고...
무심히 이불속에 발을 넣고 축구를 보는데 복희도 와서 같이 발을 넣고 보더라고...
그 후 어찌어찌하다가 장래까지 약속을 하게 되었다고

나 : "했냐?"

친구 : "아니"

나 : "키스는?"

친구 : "안했어"

나 : "보듬기는 했고?"

친구 : "아니"

나 : "뭐여 씨... 그럼 뭘 하다가 왜 약속을 했다는거여!"

친구 : "손잡고 복희가 자기 책임질 수 있냐고 하기에 그런다고 했어"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신부가 되려고 마음먹은 그 친구의 소양으로 봐서
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복희 입에서 먼저 그 약속을 취소한다고 하면 되는거여?"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의외로 진도가 빨랐다 
첫 만남에서 영화를 봤는데 홍콩영화로 '소녀' 였다 '소'자가 부를 소자로 '콜걸', 창녀라는 말
이다
지금의 롯데오피스텔 맞은편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봤는데 제일극장은 1+1으로 두편을 묶어
서 상영하던 삼류극장이었다
그 당시(1970~1975) 전주에는 극장이 7~8 곳이 있었는데 제일극장 바로 옆에 코리아극장이 
있었고 지금 고사CGV 정문 맞은편에 '삼남극장'이 있었는데 나중에 '피카디리' 로 이름이 바
뀌었다 남부시장 성원오피스텔 자리에 '중앙극장'이 있었고 관통로 디쟈트 가구 자리에는 '전
주극장', 팔달로 예술회관 맞은편에는 나중에 '아카데미'로 바뀌는 '오스카극장', 중앙시장 부
근 라마다 호텔 앞에는 '시민극장', 웨딩거리 가족회관 자리의 '공보관'은 그때 남아 있었는지 
없어졌는지 아물아물하다
암튼 영화를 고르고 골라 '소녀'를 선택했는데 1/3도 채 보지 못하고 서로 합의 하에 극장을 
나왔다 첫 만남에 너무 야하기도 했지만 재미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직접 하는 건 몰라도 남
이 하는 걸 보거나 읽는 건 예나 지금이나 끔찍이 싫어한다.
극장을 나온 우리는 헤매다가 결국 성당 사도회 사무실로 갔다
그때 영화 마지막 프로가 저녁 7~8시에 시작하여 10시경에 끝났으니 시간은 9시 정도나 되었
을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녀를 내 무릎 위에 앉히게 되었고 이야기 끝에 내 친구는 신부될 몸이니 
그와의 약속은 깨고 앞으로는 나와 놀자고 하니 흔쾌히 응낙을 한다. 휴~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네
그러는 동안 부드러운 여인을 앉힌 내 젊은 아랫도리는 어떠했겠는가. 
그야말로 활화산이 되어 부글거리고 그녀 또한 모를 리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다음 진도가 쉽게 나갈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가슴을 만지려던 손은 스치기만 하고 제지당했고 키스를 하려하니 손으로 내 입술을 막으며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는 것은 한강에 돌 던지기지만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것은 접시 위에 
돌 놓기' 라서 여자가 쉽사리 허락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돌아 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암튼 그 날은 약속을 깬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무릎에 앉힌 것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생긴다.
수녀원의 원장 수녀인 권수녀님이 좀 보자고 기별이 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 당시 내가 권수녀님에게 테니스를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좀 엄하고 원칙적인 스타일이라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카톨릭교구에서 운영하던 성모병원이 지금 대건신협 옆 남문광장 팔달로 변에 있었는데
권수녀님은 성모병원에서 수간호사로도 근무를 하고 있어서 수간호사 실에서 독대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복희  얘기였다 
수녀님은 모든 걸 세세히 알고 있었다. 무슨 영화를 보다 중간에 나왔는지 사도회 사무실에서 
뭘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개미 기어간 자리까지 다  알고 있었다. 
친구와 복희의 일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복희에 대하여 대강 설명을 해 주시는데 어릴 때 수녀원에 데려와서 수녀님들 손에 
컸고 공부도 수녀님들이 가르쳤고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세상 물정은 TV와 책으로만 
접해서 현실 감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와의 일들을 수녀님에게 말 할 때도 마치 동화 속에서 일어난 일 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하더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화하는 내내 수녀님의 표정과 행동은 평소와 다르게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수녀님의 시각은 이러했다
성직자가 되려는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려는 의로움을 나에게서 본 것이다
친구를 핑계 삼아 어떻게 한 번 따먹으려던 탕아의 양두구육이 수녀님 눈에는 왜 안 보인걸까
내막을 다 알고 그녀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다지 싫지 않았던 해프닝은 그렇
게 수녀님의 개입으로 끝났고 그녀와 나는 스치면 목례만 하는 사이에서 미소가 추가되기는 
하였으나 더 이상의 대화나 발전은 없었다 내 친구에게도 수녀님이 무슨 말을 하였겠지만 친
구는 나에게 아무 말도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 
나중에 카톨릭대도 잘 가고 사제 서품도 받았으니 그때 그 짐은 내려놨다고 봐야겠지
그 일이 있고난 뒤 권수녀님은 나에게 호의적이었고 나는 성심성의껏 테니스 레슨을 해드렸다
그 당시 전동성당에는 아스발트가 깔린 테니스 코트가 한 면 있었는데 할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던 지금은 작고하신 범신부님이 본당신부였을 때 선친께서 스폰을 끌어들여 만들었다 
주로 평일 새벽시간에 쳤는데 내가 가르쳤던 분들을 꼽아 보면 나를 중매한 김상희 경찰국장 
.부부, 나중에 치안정감으로 승진하여 경찰대학장까지 지냈으며 퇴직 후에는 한국도로교통안
전협회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내 장인어른과 고향 친구셨다는데 이사장실에서 각시와 맞선을 봤
었다
그리고 가족들과는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귀금속상을 하셨던 작고하신 장사장님,
전신전화국 골목에  있었던 김이비인후과 원장부인, 현재 제주도에 계시는 유명한 인권운동
가인 문정현 신부님, 그런데 문신부님은 사흘 정도 해보시더니 당신은 적성에 안 맞는다고 그
만 두셨는데 진짜 적성에 안 맞았는지 아니면  아침에 나오는 면면들과 그 분위기가 거슬려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테니스 치러 나오시는 분들이 경찰국장을 비롯하여 보안대장, 상공회의소회장, 건설
협회장 등등 전주에서는 입김이 있는 위치에 있는 만큼 운동과는 상관없이 사업상 청탁이나 
인사 청탁, 아니면 하다못해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복식게임 내기를 하여 지금의 경원동 우체국 골목 전주안과자리에 있었던 
‘설다방'에서 모닝커피를 시켰는데 처음에는 10잔 정도를 시켜 사장 겸 마담이 싸들고 왔는데 
그런 객들이 늘어나면서 잔 수도 많아지고 쌍화탕, 티,(홍차에 위스키 한방울 떨어뜨린 것) 등 
종류도 고급화되며 레지도 한 명 따라 왔고 차 값은 객들이 서로 내려고 해서 선수들은 굳이 
내기를 안해도 되었다
모닝커피와 쌍화탕에 달걀노른자가 들어가니 흰자는 많이 남았는데 그걸 다음날 아침에 지단
으로 부쳐왔고 그것은 항상 내 몫이었다



은행나무에서 우측 담까지가 예전의 테니스 코트였다


나와 전동성당과의 인연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매년 10월이면 전주 시내에 있었던 전동, 중앙, 서학동, 복자, 노송동, 덕진 6개 본당 
학생부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중앙성당이 거의 우승을 독차지 하였다 한다. 
그때 전동성당 본당신부님이 나중에 전주교구 부주교까지 지내신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님이었
는데 우승 욕구가 아주 강하여 앞에서 말 한 내 친구에게 우리 전동성당이 어떻게 하면 우승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단다. 
그 친구는 내가 있으면 가능 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는데 나는 신자가 아니라서 자격이 없었다 
김신부님은 그 즉시 날더러 세례를 받으라신다.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준비는 체육대회 끝나고 해"

그래서 나는 부활절도 성탄절도 아닌 9월에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운으로 체육대회 우승은 했지만 '마음의 준비'는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




저 3단 계단이 예전에는 5~6개의 계단으로 성당 앞쪽으로 당겨져 있었고
결혼식 후 계단에서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었다


1985년 2월 3일 나는 전동성당에서 결혼식을 한다. 
그 후로는 성당과의 인연은 멀어지는데 
전동성당도 변해갔다
팔달로변 담장을 헐고 중앙성당 처럼 상가 조성을 하자는 경제논리는 다행히도 막아 현재 
처럼 보존했지만 성당 내부 바닥재인 미송 등을 뜯어가는 조건으로 무상으로 바닥을 인조대리
석으로 교체했는데 고건축 전문가들은 큰 실수였다고 한다. 그 나무 바닥을 없애는 바람에 성
당이 온,습도 조절에 대한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코를 막아버려 입으로만 숨을 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020년 7월부터 2022년 8월까지 2년 동안 20억을 들인 보전보수 공사도 이 영향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일부 신자들만을 위한 테니스 코트나 성당골목에 늘어서 있던 허술한 사택 성
격의 특혜 가옥들은 없어져야 당연했지만 한 시절 구석구석 정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너무 변해버린 성당이 이제 낯설기만 하다



4. 오목대 



우측으로 전동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현재의 비슷한 위치에서....


 
어릴 적 오목대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아니 산이라기보다 아담한 동산이란 표현
이 맞겠다 우리가 간혹 놀러 갔던 곳은 오목대 위가 아니라 오목대로 올라가는 들머리였는데 
교동파출소 부근의 골목을 끼고 들어가 그 골목의 끝에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파출소라면 쩔리는 때였는데 그 앞을 꼭 통과해야 했다
그 즈음 나는 관선동 파출소에 통금 위반에 만화방 무단침입으로 잡혔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
을 타 튀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전주시내의 파출소 위치는 다 꿰고 있었다.
교동 파출소는 지금 한옥마을 중앙에 있었고 관선동 파출소는 전여중 정문 앞, 지금의 남노
갈비 본점 사거리 북동쪽 코너에 있었다. 서학동 파출소는 싸전다리를 건너자마자 정면에 
있었고 완산동 파출소는 용머리고개 지금의 광명 대장간 근처에 있었다. 다가동 파출소는 
청석동 파출소에서 이름이 바뀌어 지금 웨딩거리 전주천 방향으로 끝자락 사거리에 있었다
고사동 파출소는 중앙시장 성암교회 골목 입구에 있었고, 역전 파출소는 지금 시청 옆 현대해
상 자리였고, 가장 고약한 ‘태파’(태평동 파출소)는 지금 태평동 농협 맞은 편 부근에 있었는데 
고약한 이유는 바로 옆에 경찰국장 관사가 있어 항상 긴장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도 덕진 쪽이나 외곽에 더 있었겠지만 내가 노는 물에서 벗어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제일 중요한 게 빠졌네
전주경찰서이다 전주경찰서는 지금 한옥마을 복판에 있는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경기전 바로 옆이다
딱 그 즈음에(중2 1970년) 전주경찰서와의 사연이 하나 생각난다.
그날 응재라는 친구와 늦게까지 놀다가 통금을 넘겼다
통금에 걸리면 경찰서까지 가야했는데 한 두 번 걸린 것도 아니어서 갔다가 전과도 없고 미성
년이면 바로 훈방 조치가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지하 대기실에 위반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20여명이나 있었나?
앗~ 그런데 거기에 우리 학교 영어선생님이 있었다
키가 작고 안경을 썼으며 평소 조용한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이 우리를 알아봤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1시가 가까워지자 당직 경찰이 왔다

“미성년자 이 쪽으로 서~!”

우리를 포함해서 5~6명이 한 쪽으로 비켜서는데 그 선생님도 우리 쪽으로 슬금슬금 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경찰이

“얌마~! 니가 미성년이여?”

그러자 그 선생님은 얼른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내 친구와 나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뻔했다
우리는 손등에 패스 도장을 받고 훈방 조치되어 지금은 먼저 간 김석중이란 친구의 자취방으
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을 우리 둘만 알기로 했다 그 선생님이 너무 좋은 선생님이었거든
그래서 그 얘기가 퍼지면 놀림감이 될까봐...




저 가로등 뒤편으로 예전에는 오르내렸다



몇 십 년 만에 와보니 이런 데크길이 거미줄 처럼 잘 나 있네



파출소 부근의 오목대로 가는 길은 딱히 올라가는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약간 가파른 횡톳
빛의 빗살 바위를 1~2미터 오르면 대여섯 명이 쭈그리고 앉아 담배 피울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 곳을 자주 갔던 것은 아닌데 특별한 기억이 있다
나는 중2였고 그 당시 '석청'이라는 전주에서 제일 잘나가는 폭력써클이 있었다.
나 보다 2년 위인 김종문이란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그 당시 석청의 말단이었다
우리는 석청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도 안했는데 그 선배는 석청에 들어오려면 신고식을 해야 한다면서 
팔을 깨진 병으로 긁든가 아니면 담뱃불로 지지든가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석청에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냥 가오로 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담뱃불 자국은 이미 있어서 '불빵'으로 대신했다
팔에 볼펜으로 죽을 '사'(死)자를 한자로 쓰고 성냥골 끝에서 유황을 떼어내 글자의 획을 따라 
늘어놓고 한쪽 가장자리에 담뱃불로 불을 붙였다 
불은 순간적으로 타올랐다 사그라졌지만 내 느낌은 계속 불덩어리가 있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알고 보니 그 선배는 신입을 받을 권한이나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
기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호구였다 그 선배는 안타깝게도 20을 갓 넘기고 병으로 요
절했다고 들었다
불빵 놓은 글씨 아래 왼쪽 저녁 '석'(夕)자는 획이 촘촘해 나중에 물집이 가라앉고 
상처가 아물었어도 뭉그러져 보였다
지금 50년이 넘었지만 
이직도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정상에는 '오목대'라는 누각도 세워져있다



5. 한벽당 



60년대의 한벽당




현재의 모습


초딩때는 '햄빌땅' '햄빌땅'이라 부르며 햄빌땅을 가는 목적은 오로지 헤엄이나 멱 감으러 가
는 거였다 한벽당 앞 전주천이 키는 넘지 않는데 방방하게 수량도 많고 널찍하여 물놀이 하기
에는 딱 좋았다 
그때는 기린대로가 뚫리기 전이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한벽교도 없었고 남원에서 들어오는
국도는 '좁은목'을 지나 지금은 '무형유산원'으로 변한 '임업시험장'을 거쳐 교대 정문 
앞, 싸전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현재의 전주천서로나 교대 뒷길은 없었다. 
그러니 한벽당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탁 트여 있었다. 수려한 전주천 너머로는 남고산이 잡힐 
듯 다가 왔고 앞쪽으로는 고덕산이 시원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이 한벽당이 조선 태종때 지어질 당시는 '월당루'였다는데 그 뒤 천의 경치가 벽옥한
류로 표현되며 '한벽당'으로 바뀌었고 지금 현판도 한벽당이라고 쓰여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
으로는 '루'와 '당'의 쓰임새로 보면 누각 자체는 '한벽루'라  불러야하고 '한벽당'은 누각과 
앞쪽 전주천, 뒤 쪽 바위벽 등 주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칭이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잘 정리된 저 돌 벽 안쪽 어디에 우리의 결의문이 있을텐데



누각 뒤 쪽 바위벽에는 사연이 있는데 일명 '한벽결의'이다
중 2때의 일이다
그 당시 제일 친한 친구였던 이응재, 김덕중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결의형제를 맺었다  내가 
큰형 응재가 둘째 덕중이가 막내였다 생년월일로 따지면 내가 가장 늦은데 큰형이 된 이유는 
아마도 담배연기로 달걀이나 도너츠를 제일 잘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런 낙엽이 주변에 흩날리고 있었으니 1970년 10월 아니면 11월경 이었을 것이다
한 갑에 50원으로 그때 최고 고급인 신탄진 담배를 일부러 사서 한 대씩 태운 다음 담배갑 
안쪽에 둘러져 있는 은박지를 꺼내서 내용을 썼다. 썪지 마라고 딴에 선택을 했겠지
그 당시 '백조'나 '금잔디' 같은 필터가 없는 담배 빼고는 담배갑에 은박지가 다 들어 있었다.
내용은 대강 영원히 우정을 변치 말자는 것이었고 면도칼로 손가락 끝을 그어 피로 지장을 찍
었다 그리고는 '빤닥종이'라고 불렀던 담배갑을 감싸고 있는 비닐로 꼼꼼히 싸서 바위 틈 사
이에 깊숙히  갈무리 하고 그 장소를 유심히 기억했다 
그 뒤 몇 년에 걸쳐 한 두 번은 확인 했는데 어느 해인가 가봤더니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어 기억에 있던 바위는 사라졌고 그 틈새를 찾는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 우정이 금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반세기도 지난 사연이 되어버렸다



3학년 졸업사진을 찍었을 때인데 나는 사진도 안 찍었을 뿐만 아니라 앨범값도 까먹고 안내서
앨범도 못 받았다




같은 위치로 와보니 이렇게 변해 있다


전주에 사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한벽당'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90% 이상은 '오모가리'라고 말할 것이다
원래 오모가리는 뚝배기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민물고기에 시래기와 야채 등을 넣고 끓이
는 매운탕 이름이 되어 버렸다 중고딩때 주로 선배들과 갔는데 나는 물론이고 선배들도 빈대 
시절이었으니 한 번 가려면 큰 맘 먹어야 했다 그 당시 오모가리가 대, 중,소가 있었는데 
소가 250원, 중짜가 400원 대가 500원으로 기억하는데 내용물도 불거지, 빠가, 쌀모자 등 자
연산 고급 어종이었다. 그런데 이 오모가리를 먹는 방법이 특별했다
음식이 나오면 들이당창 건더기를 건져 먹으면 안되고 고명으로 나오는 쑥갓이나 깻잎과 국물
만 먹다가 빡빡하게 건더기만 남으면

"아줌마~! 재탕이요~~" 

그러면 육수가 채워지고 고명이 얹혀져 처음 나올 때와 똑같이 다시 내 온다
이런 재탕을 최소 3번, 많게는 너덧 번을 시켰다 우리만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한두 번쯤은 재탕을 시켰고 그때 오모가리를 먹는 일반적인 초식이었다.
나중에 직장 다닐 때 오모가리를 먹으러 간 적이 있는데 내 입 맛이 변하기도 했겠지만 
매운탕에 들어간 물고기 정체를 모르겠고 맛도 전에 맛이 아니었다. 
재탕 문화도 사라진 것 같고...  
최근 이 글을 쓰려고 가서 메뉴판을 보니 많이 변했다
쏘가리 탕 : 120,000원
빠가탕 : 100,000원
피라미 탕 : 80,000 등등 



오랜만에 걸어서 와 봤다
근데 오모가리집이 세 집 밖에 안 남았네? 남양집 간판이 두 개다
우리가 멱 감으러 다닐 때는 다섯 집이 있었다 남양집, 김제집, 버들집, 화순집, 한벽집...
김제집이 없어진 것은 오래전이라 알았고 지금 네 집이 있을 줄 알았는데 '버들집'도 문을 닫았단다
남양집이 버들집까지 먹었군



6. 전주향교 

향교는 지금도 정이 안 가고 무거운 느낌만 드는데 어릴 때는 더 했다 향교의 특성상 폐쇄적
인데다가 향교지기인 듯한 상투 틀고 곰방대를 든 영감님이 고약했다
햄빌땅에서 동네친구들과 물놀이를 하고 향교 앞을 지나갈 때면 그리 많이 떠들지 않았는데도 
조용히 하라며 곰방대를 휘두르며 눈을 부릅떴다
우리는 방천길을 따라 가면 향교 앞을 거치지 않고도 우리 동네로 갈 수 있지만 일부러 홍살
문을 지나 향교 앞으로 갔다 부근에 영감님이 있으면 조심조심 조용히 지나쳐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홀딱 홀딱 뛰면서 "땡감~!  땡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영감님의 곰방대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였는데 항상 휘두르지는 않았고 어느 때는 '소 둠벙 보듯'  
멍하게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건강상 어딘가 좀 정상이 아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땡감'이란 '영감탱이'에서 '감탱'이만 빼와서 거꾸로 써먹은 건데 영감님은 아마 절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절에는 향교 안에 들어가 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 뒤로도 갈 기회도
없었거니와 꼭 들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라도 한 번 가봐야겠다
1960년대에는 한벽당과 향교 사이의 지금 한벽문화관 자리에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이 있었고
그 시험장은 나중에 대성동으로 이전을 했다가 지금의 여의동에 자리 잡았다
시험장이 이전하고는 BBS라는 자동차운전학원이 생겼다가 1970년 중후반쯤 2층짜리 "시민아
파트'라는 전주 초기형태의 아파트가 생겼는데 단 한 동에 화장실과 욕실이 각층에 하나씩 밖
에 없었다.



전주천변쪽에서 본 홍살문과 향교



7. 학인당 



60년대의 학인당, 좌측 멀리 회화나무가 기세등등하다




현재의 학인당, 위의 회화나무는 건물에 가려 안 보이는데....


학인당은 사실 앞의 여섯 보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7'자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끼워봤다
하지만 학인당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은 남다르다
1980년대만 해도 학인당은 사유지였다
고인이 되신 '백남혁'씨의 개인 집이었고 학인당에는 주인 외에도 4집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각각 문간채가 있었고 오른쪽 문간채에 여친이 살고 있었다
홀어머니와 오빠, 남동생 넷이 살았는데 그녀를 불러낼 때면 학인당 문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건강탕 사거리에서

"진경아~!  진경아~!"

하고 불렀다 본 이름은 '금숙'인데 암호를 정한거지  
그녀는 전주근영여고로 이름이 바뀌기 전 월성여고를 다녔는데 3학년 때 내 아이를 지웠다 
전북대병원의 전신인 도립병원이 지금 경원동 전북대평생교육원 자리에 있을 때였다
같은 고3이고 머리를 빡빡 깎은 내가 보호자라고 데리고 가니 의사는 씩 웃으며 신분증 확인 
절차 같은 것도 필요 없이 차트에 싸인하라고 하더니 두말도 없이 지워줬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먼저 결혼해서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그녀와는 지금도 연락이 된다 
학인당 주인이 '백남혁'씨였다는 것도 다섯 집이 살았다는 것도 이 글을 쓰면서 물어봐서 알았다




회화나무가 위태롭다
우리 집이 바로 맞은 편이어서 거창한 나무를 늘 무심코 우러렀는데....

성당 대신 벼락을 맞아서 인가?

이렇게 '한옥칠경'을 한 번 되새겨 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