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8-06 13:06
차와 나(4)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40  
2023. 8. 6(일)

내가 탔던 자동차들

1. 브리샤픽업(1981~1983?)
2. K303(1981~1983?)
3. 봉고 2740(1984?~1989?)
4. 스텔라프리머(1985)
5. 로얄프린스 1605(1986?~1990?)
6. 소나타 2484(1990?~1998)
7. 엘란트라(1995~2004?)
8. 테라칸 2128(2002?~2014)
9. 프라이드 6616(2002~2003?)
10. SM5 1711(2014?~2016)
11. K5 2206(2016. 11 ~  2019.12)
12. K5 7216(2020. 2~   )


4. 스텔라프리머(1985)



실제 탔던 차는 이 색깔보다 좀 연하다


내가 선을 본 뒤 약혼하고 결혼까지 한 기간이 불과 4개월이 채 안 된다
네 번째 본 선이었다
나는 원래 결혼을 하려고 선을 본 게 아니었다. 빨리 결혼을 시키려는 부모님의 의도를 따르는 척 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 계속 거절을 하면서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서로 간에 미련 없이 잘 파토가 났다 
세 번째부터가 문제였는데 세 번째는 현직 진안군수의 딸이었다.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진안에 농장이 있는 선친의 정략적 의도가 다분히 깔린 중매였다 
지금 다가동 어의당한방병원 자리에 전주 유일한 호텔인 관광호텔이 있었는데 5층 그릴에서 양가 부모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선을 봤다 
첫 선에서 결론이 난 것은 없었고 추후에 당사자들끼리만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별 마음이 없었던 나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한다고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맹장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약속장소를 일부러 어머니 입원실로 잡았다가 번복을 하여 동문사거리 꼬꼬통닭으로 바꿨다 
꼬꼬통닭은 지금의 왱이집 자리에 있었고 왱이집은 꼬꼬 옆에 10평 남짓한 곳에서 현재는 거부가 된 주인여자가 
쟁반에 콩나물국밥을 2~3그릇을 담아 머리에 이고 인근 3~4층의 학원가 당구장에 힘겹게 배달하던 때였다 
꼬꼬에서 닭곰탕을 시켜 놓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좀 유별나서요. 
아직 결정 난 것도 아닌데 자꾸 병원으로 불러서 만나라니 경우가 아니라고 설득하느라 혼났네요" 

이렇게 시작해서 계속 어머니의 험담을 늘어놨다 한 번 억지 주장을 하면 아버님도 못 말린다는 둥, 
몇 년 전에 결혼한 형부부도 어머니에게 질려 발걸음을 끊었다는 둥... 충분하게 넋두리를 늘어놨다
그리고 다음 만남은 그쪽에서 정해서 알려 달라 하고 닭곰탕은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긴 채   일어났다
그 후에 그쪽에서 연락 올 일은 만무했고 나는 나대로 입원해 있는 어머니에게 뽐뿌질을 했다 

"설사 결혼은 안 한다 해도 간단히 문병 정도는 할 수 있는 건데 싹수가 없어 못쓰것네요"

이렇게 되니 결과적으로 서로 자기 측에서  퇴짜를 놓은 모양새가 되었고 
정략적 관계인 진안군수와 선친은 서로 미안한 마음에 관계는 더 굳건해졌다
세 번째 선도 탈 없이 깨졌다
그런데 네 번째는 무게감부터 달랐다 중매를 한 분이 내가 고딩때 테니스 코치를 해준 '김상희' 전북 경찰국장으로 
그 뒤 치안정감으로 승진을 하여 경찰대학장까지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경찰 서열 4~5위 정도였을 때 퇴직을 하여 
한국도로안전협회이사장으로 취임을 하였는데 이사장 시절에 중매를 서게 된다. 선 본 장소도 이사장실에서 단 둘이 봤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장인 될 분이 김상희 이사장과 죽마고우로 막역한 사이기도 하였지만 
나를 긍정적으로 호감 있게 봐줘서 그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또 하나! 선친의 작전이었을 것이다
선 본 날이 평일(금요일)이었는데 나는 선을 본다는 것도 이틀 전에야 알았고 
회사에는 뭐라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 사장님이 부른다.

"설부장에게 얘기 해놨으니 아무쏘리 말고 금요일 토요일 휴가 다녀와!"

'이거 군대도 아니고 왠 명령휴가? 제대로 덫에 걸렸군'

그 당시는 토요일에 오전근무가 있을 때였다
그리고 우리 회사 사장님은 선친의 긴밀한 후배였다 다행히도 2년 정도 후에 퇴직을 하였다

커피 잔을 놓고 마주 앉아있는 우리에게 이사장님은 물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켜줄까? 아니면 너희들이 좀 걷다가 올래?"

상대는 고개만 숙이고 있고 내가 대답을 했다

"걷다 오겠습니다."

그 이후로 생각나는 건 창덕궁 비원부근의 길을 걸었다는 것 한국일보 본사 간판이 보였고... 
상대의 목이 유난히 하얗게 보이면서 코스모스가 연상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의 물음에

"몇 번 더 봐야 알겠네요" 

부모님은 내 말을 '싫지는 않은 거구나'(사실 딱히 싫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로 판단하여 
나 모르게 전격적으로 물밑 작업을 시작하셨다 
11월 중순에 선을 봤는데 12월 15일로 약혼 날짜를 잡아 나에게는 불과 열흘 전에 통보 했으며 
넉 달도 채 안 되는 다음해 2월 3일로 결혼 날짜까지 결정을 해버렸다 
당사자들의 의견은 묻지도 듣지도 않고 양가 부모들과 김상희이사장님이 합세를 하여 꼭 조선시대 혼인 하듯이 밀어붙인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결혼을 안 하려고 뺑돌거린다는 것을 눈치 챈 거지
나중에 알고 보니 각시 될 상대는 아예 부모에게 모든 결정을 맡겨 버렸다고 한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고 어찌 대처해야 할 지 막막했다 그리고는 첫 일요일 아침이었다
선친은 전무후무한 모습을 보이신다

"동주야, 아빠랑 잠시 산뽀 좀 하자"

'아빠'라는 지칭도 영 어색했다
우리는 남부시장 천변으로 해서 신흥학교 다리까지 갔다 오는데 나는 듣기만 했다 
그날 아버지가 자식에게 당부한 인생조언의 요지는 이거였다

'여자는 결혼해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아, 나를 꿰뚫고 계셨구나. 
나는 그날 결심했다
 
'그려, 여태 효도 한 번 못 해봤는데 이게 효도라면 그냥 하자!'

그런데 문제는 결혼이 4개월도 안 남았는데 당시 사귀고 있던 10여명의 여친을 어떻게 정리를 하느냐 였다 
그 중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래도 정과 도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당시 우리 집 대소사를 관장하는 분이 계셨는데 선친의 친구 분으로 한학자이자 주역에 능통하였다 
'안사민'이란 아저씨로 삼성가의 이병철이 용인 에버랜드 터를 잡을 때 팀원으로 참가했다가 작업이 끝난 뒤 
한 몫 잡아 전주 노송동에 집을 사서 정착 했었다 
우리 형제들의 이름은 물론 모든 택일이나 선친의 사업상 조언도 그 분이 했던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그 분을 찾아갔다 의외의 방문에 아저씨 부부는 깜짝 반가워 하셨다 
안내된 방은 아마 사주 손님을 받는 방인가 보다 먹 냄새가 풍겼고 이런저런 한문 글씨체로 써 놓은 화선지가 한 쪽에 수북했다 
그날도 뭔가를 쓰고 계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내년 2월3일 결혼 날짜를 가을로 미뤄 주십사... 
체구가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의 아저씨는 2시간여에 걸쳐 사주팔자 등등에 관해 조곤조곤 설명을 하셨고 
결국 나는 도리어 설득을 당해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믿지는 않았지만 사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날 안사민 아저씨 말씀 중 사주는 40% 정도가 맞고 40%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 나머지 20%는 주변의 환경이라고 하셨다
암튼 이렇게 결혼에 대한 나의 전략은 완전히 실패를 했고 예정대로 1984년 12월 15일 서울에서 약혼을 하고 예물로 네모난 오메가 시계를 받는다.
1985년 신정 연휴에 함을 팔러간다 친한 친구들을 데려가면 시끄러울 것 같아 순딩이 친구와 동료 직원들을 데려갔다 
그냥 슬슬슬슬 들어가니 처가에 있던 인척들이 도리어 막는다 
'함 사시오!' 하며 뻐띵기란다(누가 그럴 줄 모르간디) 
그리고는 2월 3일 전주 전동성당에서 결혼식을 한다.
그러니까 각시와 나는 첫 만남이 ‘선‘ 두 번째가 ’약혼‘ 세 번째가 ’함 팔 때‘ 네 번째가 결혼식이다 
결혼 전에 함께 한 시간이 총 5시간도 안되고 단둘이 있었던 시간은 선 볼 때 걸었던 1시간 정도가 다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결혼을 하고 큰애 낳도록 ’예 예‘ 존댓말을 사용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결혼까지 일거에 몰아붙인 게 미안했는지 부모님은 신혼여행용 차를 선물해 주신다.
우윳빛인지 상아색인지 연한 베이지 색 ‘스텔라 프리마’ 였다
그 때 신혼여행지는 거의 제주도였는데 차가 생기는 바람에 동, 남, 서해안을 한 바퀴 돌기로 계획한다.
첫날밤은 유성관광호텔에서 보냈는데 내 생애에서 총 3번 마주한 붉은 꽃잎을 두 번째로 하얀 시트 위에서 발견한다.
유성을 떠난 우리는 계획을 변경한다. 한두 번 만나고 말 사이라면 신나게 뭐라고 꽁이라도 깔 텐데 
이제 평생을 할 사인데 뻥도 못 치겠고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묵묵히 운전만 하고 무료한 각시는 옆 좌석에서 자지 않으려고 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서 운전을 줄이기로 하고 동해의 위쪽을 생략하고 울산으로 향한다. 
2021년 7월 19일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송인용이란 친구가 울산 현대엘리베이터에 근무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울산을 택한 것이다 극구 사양했지만 친구는 울산 다이아몬드 호텔에 방을 잡아줬다 포항에 가서 고래 고기도 먹었다
다음날 울산에서 바로 선친의 고향이고 큰어머님이 계신 전남 보성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머지 2박을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가신동의 큰어머님 집에서 편하게(?) 보낸다.
첫 날 아침 일어나서 보니 각시가 안 보이갈래 물어 봤더니 어머님에게 물어 봤더니 양동이에 물을 떠다가 세차를 하고 있단다. 쩝~~

결혼 후 큰 집에서 같이 살게 되는데 회사도 걸어서 7~8분 거리고... 집에 봉고차도 있고
차가 필요가 없다
7월인가 8월에 차를 팔아버렸다
불과 5~6개월 같이 한 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