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9(일)
'건달'과 '깡패'는 사전적 의미도 다르지만 정서적 느낌도 다르다.
'건달'은 어쩐지 정도 있고 유하면서도 느린, 그래서 좀 무능한 듯 한 느낌이 든다면 '깡패‘는
문득 의리가 떠오르면서도 예민하고 무경우한 행위와 언행 등이 그려진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이 젊었을 때는 진취적이다가 나이가 들수록 안정적인 성향으로
변하듯이 한창 때의 깡패가 나이가 들면 건달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건달' 하면 넓
은 뜻으로 '깡패'도 포함될 수 있으니 제목을 '건달이야기'로 해본다.
나는 철없던 학창시절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어울려 싸움질도 하고 건들거리고 다닌 적이 있기
는 하지만 건달도 깡패도 아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이유는 무슨 거창
한 조직의 비사나 특종 같은 숨은 진실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고 '전주 막걸리 이야기'나 '전주
콩나물국밥 이야기' 처럼 그 시절 전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음직한 그저 그런
'뒷골목' 이야기를 재미 반 호기심 반으로 모아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주 원조 건달형님들이 도움을 주셨고 ‘북중전고 100년사’를 편집한 친구 자료
도 받고 여러 선배, 친구들에게 정보를 얻어 어릴 적부터 귀동냥한 기억들을 합쳐 정리를 해
봤다.
내가 간접적이지만 처음 그런 세계에 접했던 시기는 중 1학년 때였다. 우리 집 바깥채 3층 건
물의 1층에 30세 전후의 '신택' 이라는 분이 세 들어 왔는데 부인과 2~3살 정도 되는 수연이
라는 딸, 세 식구였다. 조그맣게 슈퍼를 열었는데 가게는 주로 부인이 봤고 '신택'은 늘 밖으
로 나돌았다. 나를 이뻐해서 장기도 그 분에게 배웠으며 나를 데리고 남부시장 나들이를 가끔
했는데 가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싸전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 방천가로 들어서면 야구선
수 김봉연의 아버지가 운영 및 상여대장을 맡고 있는 상여집이 크게 있었고 그 앞을 지나 시
장통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두 어 경로의 미로를 지나면 담도 문도 없지만 처마와
토방이 있는 방 두 칸짜리 하꼬방이 나온다. 그곳이 목적지였다. 언제나 비슷한 광경이었는데
문 앞 토방에는 온갖 신발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발들은 한쪽으로 밀쳐
놓은 채 뜯어 펼친 가마니를 깔고 윷판을 벌리고 있었다. 윷 노는 선수가 양쪽 두 명씩 네
명, 말 쓰면서 돈 걷고 회계까지 보는 심판 한 명, 구경꾼 같지만 '쑥구'(판돈 내고 내기 참가
하는 행위)들어간 사람들이 서 너 명, 항상 십여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여기 윷판은 다른 데하고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 집 옆 공터에 건영정기화물이 세 들어 있었는데 그 당시는 화물용달차가 없고 장거리 대
형 화물트럭만 있던 시절이라 트럭이 도착하면 모든 짐을 구루마꾼들이 승하차는 물론 일일이
시내 각지로 실어 날랐다. 그래서 항시 구루마꾼들이 10~15명 정도는 대기하고 있었는데 화물이
없을 때는 윷판이 벌어졌다.
그 윷판은 시끌벅적했다.
"석으로 묶어서 개로 꾸부려!"
"아녀 한 사리면 석이 계속 쫓낑게 둑은 모로 도망가고 개는 새로 달어!"
"먼소리여, 저짝은 어채피 막이라 사리 나오면 잽히든 안잽히든 우리가 져"
반면 시장 윷판은 조용했다. 말은 말꾼이 거의 알아서 썼고 선수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바꿔
써줬다.
또 하나 다른 점은 구루마꾼 윷판에서는 기술 윷을 놀았다. 윷을 손가락과 직각으로 올려놓는
'일자윷' 손가락과 나란히 놓는 '복자윷' 윷을 깍쟁이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던지는 '깍쟁이윷'
등을 저마다 째를 내며 던졌다. 나도 일자윷에 꽂혀 집에 이불 깔아 놓고 연습 꽤나 했었는
데... 윷은 탱자나무 윷이 최고였다. 질기고 가볍지도 않으면서 탄력이 있고 무엇보다 손때가
묻어 길이 나면 보기가 좋았다.
시장 윷판에서도 탱자나무 윷을 사용했는데 시장에서는 기술 윷은 금지되어 있었다.
깍쟁이에 윷을 담고 손바닥 위에 엎어 놓은 다음 다시 뒤집어 바닥에 탁탁~ 2번 이상을 두드
려 깍쟁이 안의 윷을 흩트려 놓고 던져야 했다. 그런데 꾼들은 몇 번을 두드리건 어드레스 순
간에는 윷이 손바닥 위에 기술 윷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깍쟁이는 자전거 요비링
뚜껑을 돌려 빼서 가운데 볼트 축을 제거하고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스텐 간장종지가 나오고
부터는 힘들여 요비링 뚜껑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택'씨는 내가 정기화물 윷판을 자주 기웃거리고 관심이 있는 걸 알기 때문에 윷판에 나를
맡겨두고 당신은 방으로 들어간다. 열린 문으로 언뜻 보이는 방 안 광경은 자욱한 담배연기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화투판이 두세 판 벌어지고 있는데 "한 장 더!" 라는 소리와 '삐
리칠'이니 '쭉쭉팔'이니 하는 용어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한 쪽에서는 '쬬이'('섯다'와 비슷한
데 쬬이는 패가 나쁘면 한 장 더 밭을 수 있다.)판과 다른 쪽에서는 '지꼬땡'판이 벌어지고 있
는 것 같았다.
신택씨는 방에 들어간 지 10여분 만에 나와 옆방으로 다시 들어가 비슷하게 머물다 나왔다.
마지막으로 윷판 꽁지에게도 돈을 받아 넣고 손바닥만 한 잭기장에 기입을 하고 나에게 가자
며 하우스를 나왔다. 자릿값인지 돈을 대주고 이자를 받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매일 수금을 하는 것 같았다. 나야 서너 번 따라가 본 게 전부였고...
먼 훗날 들은 말로는 남부시장에 그런 판을 3개 정도 벌린 오야지는 '신택'보다 5~6년 선배인
'한점쇠'(24년 현재 90세 가까운 80대 후반으로 살아있음)라는 분으로 사원잽이(쓰리꾼) 대장
이었다. 그러니까 '신택'은 그 세 곳 중 한 곳을 관리한 모양이다.
어느 날 하우스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양당약방 사거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넝마주이 세 명이 비리비리한 40대 한 명을 삥을 뜯는지 괴롭히고 있었다.
그걸 본 신택씨는
"이노무 새끼들 머하는 짓이여"
하며 세 명을 싸잡아 밀어버리니 넝마걸망을 진 채 모두 뒤로 벌러덩 넘어진다.
그들은 신택씨를 이미 아는 지 슬슬 피해 버렸다.
이때의 광경이 어린 나를 뭉클하게 하였으며 어쩌면 이 사건으로 내 무의식에 '건달' '정의'
'멋'이 뒤섞여 각인 되었는지도 모른다.
신택씨는 원래 35사단 헌병대에 근무하며 탈영병 검거가 주 임무였는데 만기 제대 후 남부시
장으로 흘러들어왔는데 그 시절은 군인들이 판치던 시절이라서 비록 제대는 했지만 건달세계
에서도 퇴직헌병이라는 프리미엄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는 신택씨를 한 번도 못 봤지만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택이형' '택이형' 하다보
니 내 입에서도 스스럼없이 '택이형'이 자연스러워졌다.
최근 어느 선배 말을 들으니 완전 사기꾼 같은 폐인이 되어 평화동 경로당을 전전 한다는데
조만간 수소문해서 찾아봐야겠다.
2024년 현재 84세쯤 되었나? 나와 16년 차이는 나지만
"택이형님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하고 여쭤봐야겠다.
나를 '신택'에게 연결 시켜준 사람은 '공선행'으로 선행형님은 '신택' 직계 5년 아래고 나보다는
10년 선배인 46년생이다. 남부시장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건달로 이미 돌아가신 부친을 또 돌
아가셨다고 조의금을 걷는 등 사소한(?) 몇 가지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건달이었다.
원래는 두 분을 모시고 같이 식사라도 하려했는데 두 분이 다퉜다네...
다툰 이유는 가보시키(더치페이)로 점심을 먹었는데 택이형님은 만 원을 줬다하고 선행형님은
안 받았다고 서로 우기다가
"에이, 형 안 만날라요"
"그려 고만 만나자!"
그리고는 그 뒤로 안 본지가 5~6개월 되었다고...
선행형님에게 전화번호를 받아서 직접 연락을 했다.
50년도 더 지나 처음으로 하는 통화이다.
호칭이 애매하다.
“신택 아저씨 되시죠? 저 기억 하실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건영정기화물 옆에 사실 때 안 집
에 살 던 양동주라고 합니다.”
대답 하시는 게 기억을 하시는 지 못 하시는 지 애매하다.
암튼 어찌어찌 장승백이 전북은행 앞에서 11:30에 약속을 했다.
예전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지만 첫 눈에도 알아 볼 만큼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를 몰라보기는 커녕 선친과 형 안부도 묻고 반가운 표정이 역력했다.
전화 통화 때 애매한 대답은 알고 보니 귀가 잘 안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 할 때는 내
입을 유심히 보고서야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연화미당에서 갈비탕을 시켰는데 굶은 사람처럼 너무 정신없이 드시는 걸 보니 좀 서글펐다.
'신 택' 아저씨라 해야 할 지 형님이라 해야 할 지......
술은 안 드시니 가끔 만나 식사라도 해야겠다.
택이형님과 연결 시켜준 선행형님, 각 각 따로 만났는데 대화를 해보니
내가 중계를 하면 다시 두 분이 만날 것 같다.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전주에는 여러 부류의 범죄를 내재한 그늘진 취약 층이 있었다.
건달과 노름꾼들이야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을 터고 '사원잽이'가 있었다. 쉽게 말하면 쓰
리꾼(소매치기)이다. 남부시장과 중앙시장에 각각 조직이 있었는데 남부시장은 앞서 말한 '한
점쇠'라는 분이 오야지였고 중앙시장은 모닥모닥 몇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본거지가 중앙시장
이지 활동 무대는 남부시장을 제외한 전주 전역이었다. 심지어 장날이면 봉동까지도 원정을
나갔다. 나는 가출해서 돈 떨어지면 중앙시장의 말단 오야지 '단옥'이라는 사람 밑으로 들어가
'바람잽이'로 활동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는데 바람잡이는 선수가 작업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
하며 타킷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바람잡이와 타킷과 선수의 사이에 막아
서서 제3자의 시야를 가리는 바람잡이가 있다. 나야 물론 초자라 후자에 속했지만... 단옥이
밑에는 2명의 선수와 4~5명의 바람잡이가 있었는데 내가 자유롭게 그 팀에 드나들 수 있었던
이유는 선수 중 한 명이 '김홍덕'이라고 있었는데 나와는 어릴 적부터 친한 동네 친구였다. 전
주에서는 보기 드문 사원잽이 '오대'였다. 쉽게 말하면 쓰리꾼 특급 에이스라는 말이다. 그 친
구 덕분에 나는 많이 봐줬다. 나중에는 다음 이야기에서 나오는 이유로 다시는 그 팀에 들에 갈
수 없었다. 이 사원잽이 이야기를 다 하려면 한참을 벗어나야 하니 이만 줄여야겠다.
홍덕이는 30을 못 넘기고 죽었다.
'사원잽이' 외에 '넝마주이'가 있었다.
전주천 남천교 다리 밑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고물, 폐지뿐만 아니라 널어놓은 빨래나 신발
등 눈에 띠면 긴 꼬챙이나 집게로 닥치는 대로 등에 지고 다니는 둥근 걸망에 던져 넣었다.
그러니 본업이 고물수집이라기 보다 온갖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좀도둑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세력이 상당하여 남부시장 주변에서는 무시 할 수 없었다.
남천교에 넝마주이가 있었다면 서천교 다리 밑에는 땅꾼을 겸한 거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무와 망으로 4~5층 선반을 만들어 칸칸 마다 뱀들이 우글거렸다.
남천교와 서천교와는 다르게 시장다리 매곡교는 요지였다. 각지에서 온 약장수들로 북적였고
잊을 만 하면 서커스단이 들어 왔고 판소리 무대도 수시로 설치되었다 많은 명창들이 무대에
섰고 국악인 오갑순도 이 무대를 거쳐 갔다. 그 만큼 남부시장의 상권이 활발했는데 50~60년
대 이 매곡교 부근에서 약이나 약초를 팔려면 ‘강용덕’ '강인권'(짱골목 ‘금일옥’여주인의 오라
버니들) 형제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시내의 세력이나 인근 남부배차장, 남부시장의 영역과는
별개로 매곡교 위, 아래의 약초관련 영업에 대한 권한은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거래 규모
가 큰 만큼 그의 영향력은 시내를 포함한 힘 균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층이 어렵고 치열하게 사는 가운데 뚜룩질과 동냥질하는 넝마주이, 거지들 말고
또 하나의 혐오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상이군인'들이다.
지금이야 '국가유공자'네 '보훈대상자'네 하며 최고의 대우를 받지만 그 당시는 기피 대상이었
다. 의수 대신 손목에 갈구리를 끼고 다니며 아무 가게나 들어가 갈구리부터 철그렁 올려놓는
다. 말은 한 푼 보태 달라지만 안 주면 깽판이라도 부릴 분위기다 주인 입장에서도
"없어요, 가요."
하기 보다는
"오늘은 개시도 못 했네요 다음에 오시지요"
라고 사정조로 거절해야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리 갈고리 손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절반 이상은 가짜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전 후의 피폐해진 사회는 여러 어려운 계층을 만들었는데 선배 건달들은 말한다.
'우리 전주는 건달이 아무리 궁해도 다른 밥그릇은 되도록 안 건들었어.'
나는 중1, 2학기 때 처음 가출을 했다. 중2 때부터는 밥 먹듯이 나갔다.
처음에는 주로 친구 자취방에서 신세를 졌지만 나중에는 싸구려 무허가 여인숙을 찾아다녔다.
추운 겨울이면 마지못해 이용했던 곳이 남부시장 안에 있었는데 30~40명을 한 방에 몰아 넣
고 1인당 5원을 받았다. 그 때 분식집에서 라면을 끓여주고 15원(계란 넣으면 17원) 받을 때
니까 5원이면 싸긴 싼데 베개도 이불도 없고 무엇보다도 냄새가 지독했다. 자는 사람 대부분
은 시골에서 장에 뭘 팔러왔다가 막차를 놓친 경우였다.
그 즈음, 그러니까 1970년 12월 초쯤인가?
선친께서 응접실로 불러 가보니 어느 남자가 앉아있는데 차갑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 별다른
특징은 없었고 선친께서 뭐라 소개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그 사람에게 하루 동안 맡겼
다는 것만 확실하다.
그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갔는데 집 앞에 그야말로 하얀 찦차가 있었다. 쉅게 말해 '백차'다
백차에 나를 태우고 맨 먼저 간 곳이 남부배차장 대합실이었다.
대합실 구석에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쪽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문을 열어준다.
안에는 딱 봐도 깡패 같은 험상궂은 7~8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같이 간 사람에게
모두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 사람은 그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느그들 야 잘 봐둬(나를 가리키며) 야가 양동주라는 놈인데 앞으로 밤늦게 돌아 댕기거나
집 나와서 헤매면 잡아서 반쯤 죽여 놔라"
나 들으라는 말이겠지
나도 딴에는 속이 뇔뇔한 놈인데 겁먹겠어? 하지만 말 한 사람 체면이 있으니 겉으로는 바
싹 쫄은 채 웅크렸다.
그리고 그 말은 협박 보다는 보호의 느낌이 들었다. 그 날 그 사람이 말한 후로 어떻게 중앙
시장까지 흘러들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이야기 했던 중앙시장 소매치기 팀인 '단옥이
'파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남부배차장에서 나온 우리는 곧장 전남 광주로 향했다. 아마 그 사람이 광주에 볼 일이 있었을
것이다. 차 안에서 설교하는 듯한 말을 계속 했는데 무슨 얘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읍을
지나 장성 어디쯤인가?
갑자기 차를 세운 그 사람은 차 다시방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날더러 내리란다. (우이씨, 쏘옴
허네) 겨울 논바닥은 군데군데 녹다 만 잔설이 남아있고 논 가운데는 나락 털고 난 짚더미가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주변에 산비둘기 떼가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권총을 쥐어 주며
산비둘기를 겨냥해 쏴 보란다. 나는 입이 헤 벌어졌다. 아까 남부배차장서는 채찍을 주더니
이제 당근을 주는건가? 흥분도 되고 긴장도 되었는데 총소리는 의외로 싱거웠다.
'띠옹~~~' 하지만 비둘기들이 놀라 날아가기엔 충분했다.
비둘기를 잡았을 리는 만무하고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권총은 살상용이라기보다 의전용에 가
까웠다. 암튼 그 사건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는 되었지만 가출을 그만 두거나 교화되지는 않
았다. 그 뒤로 몇 번 더 봤는데 가출했다가 그 사람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뒷덜미를 잡힌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그 사람은 선친의 심복으로 당시 전주 보안대 현역 중사 '신동기'라는
사람인데 12,12사태 때 전두환 편에 서서 육본 침입하는데 홈통 타고 올라간 것으로 유명하
다. 들리는 말로는 전역하고 김포세관에 있다가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한
다. 신동기씨는 건달도 아닌 현역 군인 신분인데 전주 3대파의 하나인 남부배차장파를 쥐락펴
락 했다는 것은 아무리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보안대란 특수성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
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일찍부터 굳이 까치발을 하지 않고도 그런 세계를 쉽게 엿볼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어떻게든 나를 정상적인 학생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었겠으나 신동기씨를 만나
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은 한 수였다.
내가 ‘전주 건달이야기’에 대한 정보를 유일하게 활자로 받은 건 '북중전고 100년사'를 편집한
친구 에게서다. 100년사 자료를 수집하다 찾았다는데 하나의 사건이었기에 그리 많은 내용은
아니었으나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것 보다 더 오래되고, 짧지만 신문에 기사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며 한 갑자가 훌쩍 넘은 현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같았지만 다행히도
우리세대와 연결 고리가 있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봤다.
'1957년 12월 19일 완산칠봉 투구봉에서 전주의 시내 깡패들과 전주 학생 연합 어깨들이 집
단 패싸움을 벌였다.
깡패들은 이정재가 조직한 화랑동지회 전북지회 소속이었는데 평소 그 세를 믿고 시내 상가나
극장가를 돌며 상납을 요구하고 남녀고교생들을 괴롭히는 등 횡포를 일삼자 보다 못한 학생들
이 나선 것이다.
각 학교의 한다하는 써클인 전고의 '죽순' 신흥고 '피라밋' 농고의 '백마' 전주사범의 '백운
크럽'이 연합하여 붙게 되었는데 투구봉 위에서는 깡패 70여명이 진을 치고 있었고 아래에서
는 학생 200여 명이 치고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깡패들은 올라오는 학생들에게 일본도를 휘두르고 권총을 쏘아 제키자 학생들은 찔리고 다치
면서 혈투를 벌였지만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급보를 접한 학교측과 경찰들이 출동하여 공포탄를 쏘며 올라와 가까스로 진압하였
다. 진압 후 깡패 27명과 각 학교 학생대표 1명씩 4명을 체포하였고 이 사건은 지역 신문인
전북일보는 물론 동아일보 등 중앙지에도 실렸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앞서 내가 현재와 연결 고리라는 말을 썼는데 이 싸움에 직접 가담을
했는지(정황상 가담을 안 했을 확률이 크다.) 모르겠지만 본문에 전고의 어깨 '이승완'(전주 원
조 건달)이란 이름이 나온다. 본문이란 친구에게 받은 카피본인데 '북중전고 100년사' 편집을
위한 자료인 만큼 전고에 대한 부분은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다. 투구봉 싸움에서 전고 가담
자들은 대부분 35회인데 '이승완' 역시 35회이다.(졸업은 36회로 했음) 싸움에 가담한 다른
학교 학생들의 이름도 여러 명 거론되어 있지만 이승완씨를 제외하고는 전주 건달사에 직접적
으로 연관된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투구봉 사건의 전말은 상당 부분이 싸움에 참가했던 학생 일부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듯 많은 주석이 달려있었는데 그 내용 중에 내가 선배 건달 분들이나 최근에 만난 선배에게
들은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있어 짚어 봐야겠다.
이야기에 앞서 연대 기준점을 잡아야겠다. '선배' '35회' 등으로 쓰다 보니 막연하고 전고 회
수를 모르면 연배 짐작이 안 되니...
내가 56년생, 전고 기수로 따지면 52회, 2024년 현재 69세이니 여기를 기준으로 삼자.
가령 전고 35회면 17년 선배에 39년생, 85세이다.
주석으로 달린 회고록의 한 부분이다.
'이 싸움에 화랑동지회 하부조직 중 가장 큰 전고의 '피아골'은 같은 학생들끼리 싸울 수 없다
며 동참하지 않았어요'
얼핏 들으면 마치 피아골을 옹호나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내용을 알기 쉽게 다시
설명하면...
'이 싸움은 화랑동지회 깡패들의 횡포 때문에 벌어진 건데 피아골은 화랑동지회 소속이라 가담을
할 경우 깡패 편에 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같은 학생들과 대결을 해야 하니 빠졌어요.'
이런 말이다.
이 회고를 한 사람은 전고 출신은 아니다.
7년 선배인 49년생(본인은 호적이 잘못 되었다고 47년생이라고 주장함) 원로 건달 이존방 형
님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주는 이정재 끗나팔이고 화랑동지고 그런 거 없었어! 선배 멫멫이 이정재랑 한솥밥 먹었다
고 거들먹거리고 댕기긴 힜는디 누가 먹어주기나 힜간디?'
다른 대선배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이정재나 화랑동지회의 전주 흔적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래서 이번에는 투구봉 사건의 주역들과 같이 학교를 다닌 전고 37회 선배님과 자리를 같이
했다.
'피아골이 화랑동지회라고? 난 못 들어 봤는디? 그때 '피아골' '죽순' '카드날스' 세 개의
써클이 있었는디 피아골이 제일 쎘어. 죽순이나 카드날스는 한수 아래였지 카드날스는 미국
야구 크럽에서 따 온 이름이라지 아마? 피아골에서 한 두 명이 빠져나가 딴 짓을 했는가는
몰라도 원래 피아골은 단순한 폭력 써클이 아니었어. 우리보다 4~5년 선배 주먹들이 결성을
했는디 그 당시 학교 주변에 불량배들이 등하교 때면 삥 뜯고 괴롭히고 교내는 교내대로 소소
한 폭력이 판을 쳐 면학 분위기가 영 아닌거여 그래서 그 선배들이 교장실로 찾아가 물팍 꿇
고 그맀디야 '우리는 어사히 공부는 틀렸으니 친구들이 공부 할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묵
인해 주십시오.' 그때 배운석 교장선생님이었는디 고민고민 하다가 조건을 걸고 응락을 해줬
는디 그 조건이라는 것이 '너희 기수에 한해서 눈감아 줄테니 후배는 절대 뽑지 말고 너희 기
수 일회성으로 끝내라!' 였다는 거여
우리도 전해들은 거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것지만 실제 그 시기의 31횐가 32회가 서
울대와 연고대, 사관학교를 젤 많이 들어갔을걸? 글고 그 1대 기수들는 교장과의 약속을 지켰
지만 후배들이 가만 있것어? 대를 잇는다고 나섰것지. 그 이후로는 좀 변질되었것지만... '피
아골'은 그런 내력이 있어 아참, 투구봉 표지판에 쌈판 벌어진 내용 써 있어 가봐'
15년 위인 김석근 선배님
그 선배님 역시 피아골과 화랑동지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은연중 불편해 하셨다. 하
긴 범생이였던 선배님이 폭력세계에 대해 자세한 걸 모를 수도 있었으리라.
37회 선배님과 만난 다음날 바로 투구봉으로 향했다. 투구봉에 '동학혁명기념관'이 크게 들어
서서 표지판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금방 찾았다.
투구봉 표지판에 쓰여 있는 사건의 전문이다.
'1957. 11. 19 일반깡패들의 행패에 격분한 전주농고 백마크럽, 신흥고 피라밋, 전주고 죽순
크럽, 전주사범 백운크럽 등 30명과 일반깡패 전동크럽, 백도크럽 등 일당 47명이 투구봉에서
일대 석전(石戰)을 벌였으나 승부가 없자 대표자끼리 격투하기 직전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
기록이 있다.'
투구봉의 푯말
표지판 내용에서도 화랑동지회를 연상시킬 내용은 없다. 화랑동지회에 자꾸 집착하는 이유는
아무리 건달세계라 할지라도 지역적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전주는 전국에서
6~7대 도시에 들 만큼 시세가 있었는데 이정재 졸개들이 중심가를 휘젓고 다니도록 놔뒀겠는
가.
회고담과 표지판 내용을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온도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동원된 인원부터 차이가 난다. 회고담에서는 양쪽 모두 합치면 300명에 육박 하지만 표
지판 내용에서는 100명도 채 안 된다. 학생 측 가담 학교와 크럽들은 일치 하는데 깡패 크럽
은 표지판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전동크럽'과 '백도크럽', 이 대목이 의미가 있는 게
전동파면 남부시장과 배차장이 주 무대일거고 지금의 예술회관 맞은편에 백도극장이 있었으니
백도크럽의 근거지는 거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동과 역전의 오거리가 빠져있는데 전주
의 정통이 가담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남부배차장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중앙동에
비하면 무게감이 훨씬 떨어진다고 봐야한다.
또 확연히 비교가 되는 게 대결의 형태이다.
회고담에는 권총과 일본도가 등장하지만 표지판에는 담담하게 '석전'(石戰)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승부가 없자 대표자끼리 결투'라는 문구도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표지판 내용
이 그 시절 '대결의 정서'였을 것이다. 50~60년대 싸움에서는 연장이 거의 없다. 맨 몸으로
맞짱을 잘 떠야 알아주는 시대였으니 그 세계에서는 나름 그게 명예였을 것이다.
회고담과 표지판에서 날짜가 12월 19일과 11월 19일로 서로 다른 것은 어느 한쪽이 오타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겠고, 회고담에 보면 '동아일보 등 중앙지에도 크게 보도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내가 1957년 11월 19일부터 12월 31일까지 그 당시 존재했던 조선, 동아, 경향신문
에 '전주' '투구봉' '깡패' '패싸움'을 넣어 검색해 봤지만 나오는 게 없었고
11. 19 ~ 11. 23, 12. 19 ~ 12. 23일자는 전 4면을(경향은 2면짜리도 있었음) 꼼꼼히 훑어
봤지만 역시 그런 기사는 없었다.(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전북일보를 봐도 2단 기사에 30포인트 정도 제목이면 기자들 용어로 '배꼽빡스'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 당시 신문 면수가 적었다는 것을 감안하고라도 전주에서 조차 거창하게
이슈가 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이리 저리 이것 저것 알아보고 난 후 나의 생각은 회고담 자체가 사건당시에 기록된 게 아니
고 세월이 흘러 가담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무용담처럼 회상한 거라서 좀 부풀려지고 과
장된 것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나는 60년대 초중반에 중앙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등하교 때는 전동성당과 성심여중고 사이
에 있는 성당골목으로 다녔는데 골목 중간쯤부터 오른쪽으로(등교 방향) 높게 성심학교 담벼
락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그 담벼락에 거칠고 뭉텅하게 낙서를 해놨는데 페인트는 귀했던
시절이라 아마 '아브라'(아스팔트 작업과정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였을 것이다.
'8240' '판토마' '황금박쥐' 가 경쟁적으로 크기를 자랑하며 쓰여 있었는데 모두 논두렁 패
거리들의 뽀시락 장난 같은 거였다.
'8240'은 인천상륙작전 때 전초부대였던 한국군 켈로부대 명칭이고 '판토마'는 64년에 개봉한
프랑스 범죄영화 제목인데 마지막 장면이 비행체 꽁무니에서 배기가스가 THE END를 하늘에
쓰면서 끝나는 것으로 기억한다. '8240'이나 '판토마'는 근거지가 어딘지 알 수가 없고 '황금
박쥐'만 교대부근 서학동 패거리였다.
이렇듯 50~60년대에는 변두리에 잔챙이들이 난립했지만 전주를 잡고 있는 그룹은 '중앙동'
'남부배차장' '오거리' 3대 파였다.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본정통에 자리를 잡은 중앙동이 가
장 무게가 있다고 봐야한다. 우리 세대(40~50년대생)에서 대표 원조 전주건달을 꼽으라 하면
‘양구’(39년생, 본명 양성순)라는 데에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덩치도 크고 잘생긴데다가 무
엇보다 맞짱을 잘 떴다. 그런데 소속은 남부배차장 이었는데 그렇게 중앙동으로 진출을 하려
해도 결국은 하지 못했다. 앞서서 이야기 했던 전고 35회 ‘이승완’도 졸업 후 오거리 소속이
었는데 그도 역시 중앙동을 넘보지 못하고 오거리에 있다가 서울 충무로로 혈혈단신으로 올라
가 맞짱으로 단계 단계 무너뜨려 충무로를 접수했다. 그 만큼 전주 중앙동의 아성은 절대적이
었다. 중앙동에도 여러 인물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탄탄한 것이 큰 무기였을 것
이다. 그 때의 중앙동은 지금의 슬림해진 웨딩거리가 아니고 관통도로(충경로)가 뚫리기 전이
었으니 현재 일품향 부근과 ‘짱골목’(전주극장골목)을 다 포함하고 있었다.
'양구'씨를 잠시 거론하자면 그 당시 남고산 자락에 샌드백과 역기를 비치해 두고 몸을 단련
했는가 하면 무엇보다 이재에 밝았던 것 같다. 1958년에 '인생원'이란 피란민 등을 구호, 수
용하는 시설이 완산교 부근에 설립되었는데 그 시설 운영에 관여하며 이권을 챙겼다한다. '인
생원'은 그 뒤로 '사랑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2024년)까지도 호성동 차량등록사업소
부근에서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양구씨는 그 후 전주고등학교 앞에 '서울(?)체육사'라는 운동구점을 차리고 각 학교에 납품하
는 등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했다. 일설에 의하면 전두환 시절에는 전경환측에서 활동을 하다
가 1990년초 전경환이 구속되자 한 동안 도미했다가 귀국했으며 현재는 국내에 생존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한편, 전고를 1년 늦게 36회로 졸업한 '이승완'은 시내 오거리에 자리를 잡는다.
1964년 상경해서 충무로를 접수해 전주 건달로는 최초로 전국구에 이름을 올리고, 나중에 태
권도계의 대부로 협회장까지 역임하지만 전주에 있었던 4~5년 동안 그 역시 중앙동으로는 진
출하지 못했다.
('이승환'이 서울에 올라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본인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건달이나 깡패는 아니지만 60~70년대 김대중, 김영삼과 어깨를 나란히 한 소석 이철승이란
전주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 뒷 배경에 입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전주 대표 건달 '양구'도 전국구 건달 '이승완'도 넘보지 못한 중앙동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
까? 비슷한 연배의 '이대수'나 '이철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기는 하지만 그들이 막강해서
넘보지 못 했다기 보다 대략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중앙동이 지켜졌다고 봐야한다.
첫 번째는 그들이 중앙동에 살고 있는 토박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너나 나나 다 어렵던 시절
재력이 탄탄했다는데 이 두 가지로 미루어 보면 그 시절 중앙동에 살면서 재력이 있다면 친일
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경찰과의 관계가 매끄러운 잇점도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양구‘나 '이승완'이 중앙동에 무혈입성이나 한다면 모를까 특별히 먹잘 것이나 이
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낯이나 내자고 '양반 건달' 사회인 전주 바닥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이
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구씨는 이권이 있는 '인생원' 같은 곳을 파고들었고 이승완씨는
큰 물을 택해 서울로 향한 것이다.
60년대 초중반은 '중앙동' '남부배차장' '오거리'를 주축으로 변두리는 군소 동네 불량배들이
난립해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60년대 후반에는 '석청'과 '나바론'이 태동한다.
(앞으로 표기되는 생년과 나이는 시내 계보를 기준으로 적용해서 실제와는 다를 수 있음)
석청은 동문사거리를 거점으로 전고 45회, (49년생) '문대현'과 친구 몇몇이 만들었는데 북중,
전고 출신만 가입 할 수 있었다. '문대현'은 창립 캡틴이었지만 재학생 때 만들어 놓고 졸업
후에는 시내로 나오지 않았다. 초창기 때 미원탑 사거리(현 팔달로 기업은행 사거리)를 경계
로 동쪽 동문사거리 방향은 '석청'이, 서쪽 웨딩거리 쪽은 신흥고의 '파도'가 진을 치고 수시
로 충돌했는데 신흥의 '파도'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파도처럼 흩어져 석청과 나바론 등으로 흡
수되었다.
'나바론'은 코리아 극장(현 고사 CGV 부근) 주변을 본거지 삼아 역시 60년대 후반에 '복영모'를
필두로 '이존방'과 '김준곤'이 주축이 되어 양산박 두령 숫자를 본따 108명으로 발족하였다.
존방형님은 나보다 7년 선배로(49년생) 이 이야기를 쓰는데 많은 정보를 주셨다.
23. 8. 20 초밥장이에서 존방형님과.... (24. 11. 2 지병으로 작고)
석청과 나바론이 양립한 가운데 진안사거리의 '빨간마후라' 경원동의 '오뚜기' 그리고 'TNT'
'먹구름' 등등이 각자의 구역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또 한진고속(현 전주행정고시학원 부
근)에서 암표를 팔면서 활동을 하고 있던 그룹이 있었는데 한진고속이 없어지자 '타워파'라는
이름으로 전북일보 스카이라운지로 거점을 옮겼다. 현재 스카이라운지는 없어졌지만 타워파의
명맥은 이어져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는 석청이나 나바론의 세가 제일 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안사거리나 중앙시장 등 남의 구역에서 함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앞서 '석청'의 구성원은 모두 전고 출신이라 했는데 그 원칙은 3~4년 후인 70년대에 들어와
깨진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동관'이란 사람이 임명중학교를 나와 고등학교
는 진학하지 않았는데 석청의 근거지인 동문사거리에 살았다는 이유로 석청에서 받아준 것이
다. 동관형님은 나와 모임도 오래 했고 한때 절친하게 지냈는데 작년(2023년) 10월에 지병으
로 돌아가셨다.
사실 '이동관'이란 인물 한 사람만 가지고도 건달세계의 책 한 권이 너끈히 나오고도 남을 정
도니 잠시 동관형님을 짚고 넘어 가야겠다.
'이동관'은 52년생으로 나보다는 4년 선배이다. 처음에는 나바론에 소속되었다가 석청으로 옮
겨왔다. 그래서 그랬는지 72년도 석청과 나바론의 집단 패싸움에 주동자가 된다. 양쪽에서 40
여명이 동원되어 다가산 밑에서 벌어진 전주에서는 보기드믄 패싸움이었는데 나바론의 '엄재
용'(2021년 지병으로 사망)은 왼손에 낫을 움켜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고무줄로 칭칭 감았던
걸로 유명하다.
싸움의 발단은 이랬다.
그 당시 여름이면 양쪽 모두 변산 해수욕장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을 치고 터를 잡아 온
여름을 보냈다. '이가풍'(석청 54년생) 같은 경우는 해마다 술장사를 해서 수입이 짭짤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8월 중순이면 철수를 했는데 전주로 돌아와서는 뒤풀이를 했다.
장소는 시내와 멀지 않으면서도 외지고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태극산(현 기전대 뒷산)에서
주로 했는데 그 해에는 공교롭게도 겹치게 된다.
나바론이 먼저 와서 판을 벌리고 있는데 석청이 나중에 올라오면서 서로 충돌이 일어났다.
변산에서는 서로 눈에 거슬려도 타지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부딪히지 않고 잘 넘겼는데 전주
로 돌아와서 터진 것이다. 이때 석청의 '양남석'(53년생 당시 18세)이 나바론의 '김철석'(53년생)
에게 등에서 옆구리에 걸쳐 칼에 찔리면서 다가산 다구리(패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는 없었지만 다수의 중경상자가 발생했고 석청에서는 1명,
나바론에서는 6명이 구속되었다. 이 싸움의 주동자와 도발자는 석청의 '이동관' 나바론의 주
동자는 '엄재용'인데 나바론에서는 엄재용외 5명이 구속된 반면 석청은 '장인철' 혼자만 구속
되었다. 인철형은 어렸을 때부터 친한 동네 형으로 현재도 가끔 만나 한 잔 하는 사이다. 인
철형 혼자 구속된 이유는 스스로 주모자라고 독박을 써버린 것이다.
그때 구속된 인철형은 교도소 안에서 상체에 온통 문신을 하게 되는데 출소 후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는 이런 몸으로 어떻게 자식과 목욕을 할 수 있겠냐며 병원에서 지우는 시술을 받았다.
그런데 제대로 지워지지 않고 화상 입은 것처럼 얼룩져서 여름이면 런닝 차림을 못 한다.
‘이동관' '장인철' '엄재용'은 친구뻘이며 그 싸움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당시의 그들의 나
이는 모두 19살이었다.
남부시장에서 자주 만나는 인철형님...
'이동관' 시기 이 후로 '석청'은 전고파에서 비전고파로 체질이 바뀌면서 폭력성이 강해진다.
그 증거로 이전의 전고파 석청 멤버들은 폭력전과가 거의 없지만 이 후의 비전고파는 대부분
전과 이력이 있다.
물론 '이동관'이 싸움 한 번 주도했다고 해서 조직을 대표 할 수는 없고 비전고파에는 그 외
에도 1년 선배이면서 초기 멤버인 '김진성', 나중에 살인으로 복역을 하게 되는 '이안석' 등
유명한 여러 인물들이 전반적으로 조직에 영향을 줬지만 훗날 행적의 무게를 고려해서 '이동
관' 위주로 전개 하는 것이다.
그 패싸움이 있고 3~4년 후 '이동관'은 2년 후배인 '길정원'(2018년 지병으로 사망)을 데리고
상경하여 강남의 리버사이드 호텔에 둥지를 틀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여
러 세력들과 충돌하면서 결국 서울구치소에 수감이 되었고 그 때의 사건으로 전국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 당시 같은 팀에는 나중에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린 '용팔이'(본명 김용남)도
있었다. 이들이 손쉽게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깡이나 운도 있었겠으나 이미
원로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이승완'의 속셈이 있었다고도 한다.
출소 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로 돌아와 극장 사업을 하게 되는데 80년대 초반
으로 갓 30 을 넘긴 나이였다. 일찍 이재에 눈을 뜬 그는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게 된다.
CGV 등 대형 브랜드가 생기기 전인 80~90년대에 명절 즈음이면 하루에 마포대 자루로 2~3개씩
돈을 눌러 담았다고 한다.
'이동관'의 황금기는 90년대 후반부터였다.
정치인인 '정동영'이 정계에 입문하던 1996년에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정동영'과 '이
동관'은 전주초등학교 56회 동창이다. 그 당시 KBS에서 방영되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사
람 찾기 프로그램에서 둘이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서울대를 나와 언론인으로 성공한 뒤 정계에 입문한 상태고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도 변변히 못 나오고 주먹세계에 몸담고 있다가 사업가로 변신 했는데 초등학교 졸업 후 30
여년 만에 TV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물론 계속 서로 교류가 있어 왔지만 TV프로 특성상 처
음 만난 것처럼 각본을 짜 맞춘 것이다. 그 후 '정동영'이 국회의원으로 통일부 장관으로 승승
장구하게 되자 절친으로 알려진 '이동관'의 입지는 저절로 굳어지게 된다. 전주에서 시의원이
나 도의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서로 줄을 대려고 난리였다.
2000년도 초에 '이동관'은 '석청산악회'라는 모임을 만드는데 건달 출신이 주축인 만큼 전주에
서 말마디 하는 정재계 인물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면서도 눈치를 봤다. 나는 순수하게 산행
안내를 위해 동참을 했고 초기 회칙들을 만들었다.
2006년에는 내가 안내산행을 하여 2박3일로 지리산을 종주하기도 했다.
2006. 5. 18 동관형님(좌)과 병선형님(우) 주능 종주의 마지막날
병선형님은 2024년 현재 '석청산악회'의 새로운 이름 '섬돌'의 회장이다.
2009. 5. 16 '석청산악회'가 모악산에서 주최한 '정동영과 함께 가는 길'
연두색 우비의 정동영과 우측 옆의 동관형님
2010년 후반 들어 '이동관'의 건강 악화로 사회활동이 어려워져 '석청산악회' 참석을 못하게
되자 모임의 성격도 달라지고 명칭도 '섬돌'로 바뀌어 2024년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정치 색깔이 있는 '석청산악회'와는 달리 순수 OB건달들로 이루어진 '석청회'라는 모임이 있
는데 처음에는 '석청'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가 언제부터인가 소속에 관계없이 전주의 흘
러간 건달들이면 누구나 동참하는 모임이 되었다.
전주 '석청회'가 있고 재경 '석청회'가 있는데 서울 석청은 잘 돌아가고 있는 반면 전주 석청
은 사소한 이유들로 휴지기에 들어가 있다.
과거 수많은 폭력 써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50년 이상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름이라도 살
아있는 것은 '석청' 뿐이다.
전주의 건달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두 번 있었다. 그 첫 번째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
가던 71년이었다. 풍남문 인근의 행원(원래는 요정이었는데 현재는 카페로 바뀌었음) 맞은편
2층에 '깐쏘네'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그 당시는 음악다방이
가장 핫한 유흥업소였다고 한다. 전주에는 중앙동에 '야꾸쟈' 하고 '깐쏘네' 단 두 곳 밖에 없
었다는데 여러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기도(지배인 또는 영업부장)가 필요했다.
'깐쏘네'의 기도는 현역 귄투선수 건달인 '김연주'(45년생)였는데 기도가 본업은 아니고 '김동
호'라는 친한 형이 주인이어서 재미삼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권투 선수였던 만큼 맞짱에
는 거의 적수가 없었다.
71년 겨울이었다.
2년 후배인 '김병국'(47년생 지병으로 사망)이 가게로 올라온다.
"야! 니가 여그 머하러와 가 임마"
평소 망나니 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김병국'을 못마땅하게 여겨 '김연주'는 항상 개무시 했고
그걸 잘 알고 있는 '김병국'은 이 날 맘먹고 온 것이다.
"지기미 형이면 다요? 왜 맨날 나만 먹어대는 거여, 나와요 한 번 먹게!"
"뭐여 저런 후랴들놈이... 그려 먹자!"
'김병국' 먼저 나가 내려가고 '김연주'가 뒤따라가는 상황이었다.
나가서 맞사지를 먹으면 '김병국'이 이길 확율은 거의 없었다.
계단 중간쯤 내려가던 '김병국'은 돌연 돌아서더니 미리 준비해 간 사시미칼로 '김연주'의 오
른쪽 허벅지를 깊숙이 질러 버렸다. '김연주'는 무력하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김병국'은
유유히 떠났다. 직 후, 지금의 오거리 국민은행 옆에 있었던 황(장?)외과로 옮겨져 봉합수술을
받고 별 탈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감염되어 화농이 심해지자 예수병원으로 옮겨 재수술을 했지
만 결국 허벅지 위쪽을 절단해야 했다.
일설에 의하면 후배들이 추우면 안 된다고 상처 부위를 담요로 싸매고 석유곤로를 옆에 켜놓
는 등 극성을 떨어서 악화되었다는 말도 있다.
내가 고딩때 남부시장에서 한 쪽에 목발을 집고 있는 외발의 김연주씨를 자주 목격했는데 그
때는 그런 사연이 있었는 지는 몰랐다. 전주에서 유래 없는 하극상이었고 유래 없는 연장질이
었다. 좀 부풀려졌겠지만 이 당시 '김병국'을 검거할 때 기동대 소대 병력이 출동해서 겨우 체
포할 정도로 악랄하게 반항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점잖고 낭만적인 전주 건달 문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패싸움을 하기 보다
는 대표자가 나와 1 : 1로 맞짱을 뜨고 지면 승복을 하고 이긴 쪽에서는 "어이, 운동 좀 더
하고 와야것네" 하고는 어울려 막걸리 잔을 나누던 정정당당한 시절은 영영 간 것이다.
시절이 바뀌는 첫 신호탄이 '석청'과 '나바론'의 집단 패 싸움 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전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75년 서울 사보이 호텔에서 '조양은'패거리의 신상사파에 대한 칼부림 사건을 보면
70년대 초중반의 시기가 멋과 격이 있던 한국의 건달세계를 전반적으로 잔혹하게
뒤집어 놓았다고 봐야겠다.
두 번째 변곡점은 70년대에서 80년대로 막 넘어 간 80년대 초 쯤이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삼청교육대가 생기면서 특별한 사안이나 사건의 경중, 관계없이
깡패나 건달이라 이름 붙어 있으면 마구잡이로 채가는 시기라서 관할서에 관리 명단이 있는
정도의 인물들은 거의 잠수를 타야했다. 그 당시 경찰은 계엄군의 지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고깝게 여긴 일선 형사들은 평소 호형호제 하던 일부 건달들에게 정보를 흘려 미리 도피하게
하기도 했다.
그때 절로 피신한 일부는 중노릇에 맛을 붙여 계속 그 길로 간 경우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건달세계는 순간 공백이 생긴다. 그 틈새로 기존 리스트에 없던 신진 세력들이 등장하
게 되는데 전주에서는 '월드컵'과 '나이트'파가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폭력써클이나 조직의 명칭이 정해지는 걸 짚고 넘어가 보자면 대략 세 가지 경우가 있
다. '중앙동' '남부배차장' 같이 지역명이나 특정 장소가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고 '석청' '나
바론' '빨간마후라' 등은 설립자가 아예 처음부터 이름을 지었는가 하면 '월드컵' '나이트' 는
조직원들의 활동 근거지가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지만 스스로 붙인 게 아니고 강력계 형사들
명명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나이트'와 '월드컵'의 등장은 건달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첫 번째로 '조직화'다.
기존에는 '중앙동'에 소속되어 있어도 '석청'가서 놀아도 되고 그도 저도 실증나면 안 나가 버
리면 그만이지만 조직화 후에는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빠져나오기
는 더 힘들었다.
두 번째는 '보스체계'다.
그 동안은 서열이 나이 순이었다. 물론 특별하게 기질이 있어 1~2년 선배 정도는 막 먹어 친
구 같이 지낸 경우는 심심찮게 있었지만 어쨌든 사회적 선후배는 연령 기준이었다. 하지만 조
직화 후에는 조직의 보스가 연령에 관계 없이 서열 1위가 된다. 보스라고 해서 사회 선배들을
무시하고 대우를 안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힘은 '보스'에게 있게 된다.
세 번째는 '이권창출'이다.
'이권 없은 싸움은 하지 마라!'는 게 제 1 강령일 정도로 이익추구가 우선이었다.
초창기 때야 돈 생길 곳은 유흥업소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주에서도 전주관광호텔(현 어의당
한방병원자리) 나이트 크럽을 근거지로 '나이트'파가 생겨났고 서울소바 맞은편에 있었던 극장
식 스탠드바인 월드컵을 중심으로 '월드컵'파가 자리를 잡는다.
80년대 후반 양대 파가 기반을 다져 갈 무렵 한 사건이 터진다.
'월드컵'파 조직원인 'JY'(61년생)가 '나이트'파 라이벌을 살해했는데 그것도 싸우던 도중의 과
실치사가 아니라 칼 맞고 응급실로 실려 간 상황에서 응급실까지 쫒아가 확인 살해를 한 것이
다. 일견, 잔혹하고 악랄해 보이지만 가해자의 변을 들어보면 상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회
복되고 나면 본인이 도리어 당할 거라는 두려움에 끝을 내야 했다는 것이다.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가는 대목이다.
그 후 피해자 측에서는 끝끝내 합의를 해주지 않았고 가해자는 27년을 복역했다.
이런 사건들은 두 조직을 대외적으로 알려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이트파의 보스는 '김용구'(55년생)로 원래 중앙시장 출신이었는데 후에 중앙동에 있는 '은좌
크럽' 영업부장을 하다가 관광호텔 나이트로 옮겨 세력을 규합했다.
지금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전주 OB건달 모임 중 '구사모'라고 당구를 좋아하고 당구장에서
결성된 모임이 있었는데 혹자는 '구'가 김용구 '구'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월드컵'의 보스는 '주오택'(55년생)으로 전고 51회로 입학을 했다. 학창시절 도끼 들고 교무실에서
난동 부린 사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와 친구 몇몇이 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거칠게 놀았는데
그 이유는 멤버 중 'HJ'라는 친구가 희귀병으로 고등학교도 졸업이 어려울 거라는 시한부
통보를 받고 자포자기 상태로 마구잡이로 좌충우돌 휘젓고 다녔고 친구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같이 동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HJ'는 멀쩡하게 졸업 후 대학까지 진학했고 '주오택'
만 주먹세계를 선택하게 된다. 'HJ'는 그 후 30세가 넘어 결국 그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양쪽 보스들은 이제 70줄에 들어섰지만 아직 건재하다. 조직이 30년 넘게 지속될 수 있는 이
유는 무엇보다도 경제력이다. 두 조직도 건설 쪽에 관여하면서 조폭의 체질 개선도 했을 뿐만
아니라 이권도 챙겼고 조직원 몇몇은 그 길로 들어서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자금줄들이 지금도 조직의 큰 힘일 것이다.
나는 90년대 이후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또 만일 알려고 한다면 이제 나
보다 후배들을 만나야 하는데 현역 쪽에 가까워지니 좀 쩔리기도 하고...
2010년대 리베라호텔 사우나가 있을 때는 '김용구'는 거의 매일, '주오택'은 한두 달에 한 번 정
도 만날 수 있었는데(나는 거의 새벽시간에 간다.) 재미있는 것은 묵계적인지 우연인지는 모르
겠지만 '김용구'는 새벽시간에 오는 반면 '주오택'은 낮 시간에 오기 때문에 둘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2019년 6월 리베라가 없어지면서 나는 서부시장의 '아로체'라는 곳으로 사우나를 옮
겼고 그 뒤로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요즘은 '아로채' 사우나에서 종종 '김동진'(62년생 월드컵파 전 레스링협회 부회장)과 아주 가
끔 '이영국'(58년생 나이트파 모악장례식장 대표)을 본다. 이들도 이제 60이 넘고 70이 가까워
오는데 온 몸에 혐오스럽게 문신을 했거나 깍둑머리의 젊은 현역들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걸
보면 조직의 여러 특성에 더해 영속성까지 느껴진다.
최근 뉴스를 보면 MZ세대 조직들은 세력을 온라인상에서 구축하고 자금줄도 사이버도박으로
확보한다는데 앞으로 AI시대가 차츰 도래하면 건달세계도 어떻게 변 할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건달이야기는 말 그대로 할아버지가 해 주는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