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1-01 00:06
패자의 기록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522  

2025. 1. 1(수)


‘패자의 기록’

원래 내 홈피의 공식 명칭은 ‘광속단’이었다.
처음에는(2001년) 다음 카페에 만들었는데 거기에 만들어 놓으니 다른 회원들도 들어오게 되고 
무엇보다 올린 사진들을 다른 사이트와 공유하는 게 어렵게 되었다.(회원이 100여명 되는 
daum 광속단 카페는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독자적인 홈피를 만들게 되었고 오로지 지리산 산행기를 위한 홈피였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산행기 외에도 여러 글과 사진들을 올리게 되었고 어느덧 4반세기가 가까워 온다.
그리고 이제 책을 묶기 위해 홈피 명칭을 ‘패자의 기록’으로 바꾸고 
2025년을 맞아 3년 전에 써 놨던 책의 머리말을 공지로 가져와 본다.


머  리  말

나는 실패한 인생이다.
가족, 경제, 대인관계 등 어느 하나 정상적인 게 없다.
이제 70을 앞두고 있으니 만회나 회복도 불가능하다.

나의 시작은 불공평하게 앞서서 출발했다.
베이비붐시대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직장도 낙하산으로 들어간다.
결혼과 동시에 아파트도 한 채 물려받는다.
'지리산 그늘이 삼도 팔백리'라고 그야말로 그 그늘 아래서 모자라는 것도 귀한 것도 모르고
누리 듯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10.26 12.12 5.18 같은 격동기에도 민주화운동은커녕 좌우의 이념이나 현실에 대한 가치관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시절에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핑계가 있긴 하다.
직장도 별 어려움이나 스트레스 없이 다녔다. 신입 때는 낙하산이란 보호막이 있었고 중견 때
는 회사의 오래된 구태를 벗고 혁신하려는 사주의 의지로 새롭게 기용된 임원진들에게 인정을
받아 IMF 후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승승장구 했다.
퇴사 후에 조차도 전 직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대부업이나 시행업을 했으니 나 혼자의 힘으로
는 뭘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몰락과 실패는 돌이켜 보면 '이재(理財)'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 있지만 좀 포장을 해보
면 '재물에 대한 무욕'이 아닐까(그러니까 나는 성직자가 되었어야 했다니깐)
경제적 파탄은 스스로는 물론 가족과 사회생활마저 도미노로 무너뜨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부도로 손을 들을 당시 공적, 사적 부채가 200억이 넘었는데
(10년 뒤 2018년 파산면책 신청 했을 때는 473억으로 늘어났다.) 개인채무로 보증을 서줬던
동료들에게는 가까스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털고 손을 들었을 때,
집도 절도 없이 친구 사무실 한 쪽에 라꾸라꾸 하나 놓고 기거를 할 때 참으로 막막했지만 한
편으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억지로 빌려와 홀가분하다고 스스로를 부추겨 보기도 했었다. 
아니, 실제 인생에 대한 체념과 함께 공허한 편안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 동안 그런 편안함을 견디다가 60이 되어서야 노후대비 궁여지책으로 개인택시를 목표로
회사택시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 일생에서 아무 도움 없이 제대로 마음먹고 혼자
시도한 첫 번째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 내 재정 상태는 몇 백억의 빚이 있었을 뿐 보증금 300만 원짜리 원룸과 핸드폰
마저 타인이 빌려준 것이었다.

이렇듯 온전치 못하게 세상을 살아오면서도 일관되고 유일하게 해 온 것이 있었다.
소질도 재주도 심지어 특별한 목적도 없이 끄적거려온 낙서 같은 글들이 그것이다.
학창시절과 군 생활 때부터 써 놨던 두꺼운 대학노트는 언젠가 어디선가 분실해버렸고 20여
년 전 지리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홈피를 만들어 산행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다른 게
시판을 만들어 주절주절 넋두리를 늘어놓은 게 합치면 게시번호로 1,000개가 넘고 사진도 몇
만장에 이른다. 그런데 이 20여년이 몰락하여 나락에 떨어지는 내 어두운 시기와 딱 맞아 떨어지니 
열심히 끄적거렸던 나는 실패해가는 나의 페르소나였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써왔던 만큼 글들에 대한 애착이나 소중함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작년(2021년) 10월 개천절 연휴기간 2~3일 동안 홈피가 먹통이 되었다.
이때가 처음이 아니고 8월 광복절에도 그랬었고 그전에도 간혹 연휴 때면 장애가 있다가 휴일
이 지나고서야 원상복구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이유도 각각이었다.
암튼 내 홈피가 연결되어 있는 호스팅회사가 뭔가 문제가 있고 불안했는데 옮기려 해도 데이
터가 너무 방대해서 엄두를 내지 못할 뿐더러 백업을 받는다 해도 그 뭉떵 거려진 쓰레기 덩어리를 
언제 어떻게 펼쳐볼지도 막연한 일이다.

작년 10월 홈피가 먹통 되었을 때의 일이다.
자주 홈피에 들어와 보면서 내 홈피를 보면 마치 '트루먼 쇼'를 보는 것 같다고 하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왜 홈피가 안 열리네?"

"잊을 만하면 그러는데 아무래도 호스팅업체가 좀 불안해"

"그러다가 그 회사 망해서 다 날아가면 어떡해"

"날아가면 말지머"

"너무 아깝잖아"

"..........   "

이 대화 전까지는 써놓은 것들이 날아가 버린다는 가정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근데 '진짜 없어져?'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니 대부분이 쓸데없는 것들이긴 하나 몇
몇은 아까운 것도 있었다.
이걸 계기로 며칠 궁리를 하다가 딴에 어려운 결론을 냈다.

'그래, 골라서 책으로 묶자!'

이룬 것도 남길 것도 없이 저물어가는 생인데 마지막으로 그거 한 권 만든다는데 괜찮지 않겠어? 
책은 2025년에 70세 기념으로 내기로 했으니 4년이나 남았지만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급하다.
책 편집 앱이나 프로그램 등을 여기저기 알아보니 귀결되는 게 어도비에서 나온 ‘인디자인’이
란 프로그램이었다. 최신버전은 구하기 어려워 구버전으로 일단 깔아놓고 책도 한 권 샀다.
여유 있는 출판을 위해 적금도 들었다.
노트북과 외장 메모리도 준비했다.
책 제목도 열심히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하룻밤의 꿈'이라고 하려하다가 임팩트도 없고 허무주의 같아 포기하고 곧이곧대로
'실패한 인생의 아까운 쓰레기'라고도 생각해봤는데 너무 긴대다가 신파적이어서 혼자 쓴웃음
을 지었다.
고민 고민 하다가 잠정적으로 '패자의 기록들'로 결정을 했다.
나중에 책이 완성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런 과정이 즐겁다
이제 머리말을 다 썼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
수록할 것들을 뽑아 아래한글에 옮기는 한편 같이 올릴 사진도 파일에 정리하고 인디자인 공
부를 열심히 해서 편집까지 내 손으로 완성해 봐야겠다.

2022.  2. 15  미리 써 본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