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24 15:58
당신의 사진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27  
2025. 3. 24(월)

1980년 11월 어느 날,
그러니까 광주운동이 있던 해이고 내가 제대하고 한 달 후쯤이다. 
전동 우리 집 응접실에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선친과 고인이 된 형, 그리고 내가 앉아 있다. 
선친은 팔걸이와 등받이가 호화롭고 철마다 방석과 등쿠션이 바뀌는 거창한 대나무 재질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응접실의 남동쪽 구석에 있는 내 허리만 한 높이의 다이얼과 열쇠가 
같이 시건장치로 되어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내 기억에 그 안에는 집문서, 당좌수표장, 어음, 각종채권 그리고 6mm 포르노 필름도 있었다.
(그 때 우리 집에 소형영사기가 있었다.)
선친은 밀봉된 누런 봉투를 꺼내 와 우리 앞에서 뜯으신다. 내용물은 꺼내지 않고 봉투를 
형에게 건네시며

"너희 엄마 유서다. 너희들이 장성하면 보여주라 해서 지금껏 개봉하지 않고 보관해 왔다."

의외의 말씀에 순간 멍~ 해졌으나 바로 정신이 돌아왔다.(저 안에 유서가 있을 줄이야) 
그러면서 나는 어머니, 유서, 이런 낱말들 보다 '개봉하지 않고'에 더 신경이 쓰여 뜯어진 
곳에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이런 내 순간적 반응은 어머니를 떠올리기 싫어하는 
방어기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선친이 유서를 뜯어 보셨거나 안 보셨거나 뭐가 중요한가.
형은 누런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는데 네 겹으로 접혀진 4~5장의 양면괘지였다. 
유서를 읽는 형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린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선친이 앉아 있는 의자 옆의 현란한 대나무 장식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그 속에서 윌리를 찾아내고는 정신을 추스르며 마음을 굳힌다.
선친은 켄트 양담배를 한 대 태려 무신다.
이윽고 다 읽은 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나에게 건네준다.
유서를 받아든 나는 선친을 향해

"이거 제가 가져가도 되죠? 나중에 차분하게 보려고요."

"너 알아서 해라."

나는 유서를 봉투에 집어넣고 바로 응접실을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선친은 유서를 보고 난 우리의 질문에 만반의 준비를 하셨는지 좀 허망해 하는 눈치였다. 
형은 급히 나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마치 내가 유서를 없애버릴 것을 염려나 하듯이

"너 보고 나면 나 다시 줘라. 아직 자세히 안 봤고 유서는 내가 보관 할 테니까."

사실 유서를 보지 않고 태워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까 의자 옆 무늬에서 윌리를 찾았을 때부터 유서를 읽지 않기로 마음먹었거든 
나는 곧바로 유서를 형에게 줬다.

"나 읽기 싫어. 형 마음대로 해."

내가 2살 형이 6살 때이니 자그마치 20년이다.
형이야 어느 정도 단편적이라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겠지만 나는 전무하다.
초딩 몇 학년 때던가?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사진 상으로 봤다. 
세 분의 여인과 3~4살 정도의 형 사진에서는 누가 어머니 인지 구분도 못했다. 
느낌상으로는 오른쪽 여자분이 엄마인지 알겠으나 얼글은 몰랐었다.




선친과 생모의 사진인데... 과연 친밀해 보이는가???
옆에는 있지만 애정이 있어 보여??
그 시대는 그랬는가?


형과 엄마의 사진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


나중에 먼발치의 사진을 보고서야 어머니의 이미지를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의 사진은 여러 장 있었지만 나와 어머니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20년 전에 써 놓은 유서를 읽고 어쩌라고...
형은 대학도 서울로 가고 직장도 서울, 결혼 후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 전주 우리 집과는 
어차피 멀어졌지만 내 느낌에 유서를 읽은 후 형은 확실하게 집과 더 소원해졌다. 
나는 그래서 더 내가 안 읽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 무의식 안에는 어릴 적에 거쳐 간 유모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갇혀 시도 때도 
없이 들린다.

'독혀 독혀 그 어린 것들을 두고 어떻게 그릿디야.'

그런가 하면

'아이고 오죽혔으면 어린 것들 두고 그릿것어.'

1965년 12월 3일 선친은 새 장가를 드신다. 
내가 9살 3학년, 형이 13살 6학년 때이다. 
생모의 기억이 있었던 형은 거부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새엄마와 사이도 안 좋았다. 
하지만 생모를 전혀 모르던 나는 없던 엄마라는 존재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자 
신기하고 새로웠다. 그 즐거운 시간은 내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2년에 불과 했지만...
그 뒤로 그 즐거움에 대가는 혹독했다.
시대적 분위기가 굳이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의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아도 계모나 새엄마라는 
단어는 모질고 악랄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형은 가는 곳 마다, 선친의 고향인 전남 보성을 가나 생모의 유일한 방계 가족인 언니가 
계시는 서울을 가나 나를 악심 먹고 놀려댔다. '계모에게 알랑거리는 간살쟁이'라고...
더구나 그 2년 이후에는 나는 사면초가가 된다. 
믿었던 새엄마는 동생들에게 빼앗기고 선친과는 애초부터 극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음은 물론 밖으로만 도셨으니 말 할 것도 없고 형과의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진다. 
나의 순수함과 감성은 이 시기에 할퀴어지고 딱지지고 찢어지고 아물기를 반복해서 
각질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겪고 넘어 온 20년이다. 
그 사이 나는 생모의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사실은 딱 두 가지 뿐이었다. 
자진(自盡) 하셨다는 것과 발단이 선친의 도에 넘치는 바람끼 였다는 것이다. 
죽음의 방법, 장소, 직접적인 원인 등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겠지만 아예 알기가 싫었다. 
각질화가 된 사고에서 만들어진 나만의 공식은 '앎=그름 모름=옳음'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유서도 읽지 않음이 나에게는 옳음이다.
이제 생모가 가신 지 70년이 가까워 온다.
선친이 가신 지도 15년이 넘었다. 
형마저 5년 전에 고인이 되었고 
나도 곧 죽어도 이상 할 것 없는 칠십 줄에 앉았다. 
이런 마당에 이런 넋두리 들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랴 만은 
올 초(2025. 1. 27)에 미국에 있는 이종사촌 형에게서 뜻밖의 사진이 온다. 
앨범을 정리하다가 내가 나온 사진들이 있기에 보낸다고 넉 장의 사진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장이 생모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진이었고 내가 시각으로 나마 느낀 최초의 엄마와의 접촉이었다.
이 사진으로 인해 부질없이 지난 일을 더듬어 본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서울에 있는 조카에게 친할머니 사진 있으면 보내라고 했더니 
10여장을 보내왔는데 그 중에 문제의 그 사진도 있었다. 
형이 일부러 나에게 안 보여 줄 수도 있었고 
.아니면 나에게도 그 사진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생모에 대해 내가 알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하나의 즐거움이 생겼다. 
아침마다 사우나 거울 속의 나에게 오버랩 되는 늙어 쳐진 선친과 
형의 얼굴에서 무상함과 무력감을 느꼈는데 상쾌하고 신선하게도 친엄마는 영원한 30대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우리 말의 여러 표현이 어지럽다.
엄마, 어머니, 생모, 친모.......  나는 커 오면서 지금까지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