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20 19:44
[대마도(둘째날)]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061  
<2008. 8. 10(일) 둘째날>         

06:00 기상
06:30 아침식사
      
아침상, 아직 밥과 국이 안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티아라쇼핑센터 부근으로 모인다.
      
저게 나를 뭘로 보고.....(쇼핑센터 부근 오토바이에 매어져있는 아키다)
일본 대표견인인 아키다견인데, 우리 진돗개와 일본토종견이 섞여 지금의 아티다견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할 버스, 기사와 가이드가 오늘 처음 만났다네... 
07:30 티아라 출발
오늘의 일정은 가미자카공원을 들렀다가 다시 이즈하라시내로 들어와 면세점 쇼핑을 하고
쓰시마 유일의 국도인 382번 국도를 따라 동북동 방향으로 올라가며 만제키바시(만관교)를 건너
진행하다가 잠시 382번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를 타고 에보시다케 전망대와 와따즈미 신사를
구경하고 다시 국도로 돌아와 한국전망대를 거쳐 점심을 먹고 해수욕장에 잠시 머물다가
승선을 하면 끝난다. 
가미자카 공원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가 ‘18번‘에 대한 유래를 설명한다.

가장 잘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18번'은 일본 가부끼의 대본 18종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엔 교오껜(狂言)을 뜻하다가 나중에 '장기'라는 뜻으로 변했다.
여러 장(場)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부키에서 장(場)이 바뀔 때마다 막간극을 공연
했는데, 17세기 무렵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가부키 배우가 단막극 중에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를 정리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가부키 
광언(狂言, 재미있는 말) 십팔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8가지 기예 중에 18번째 기예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하여 십팔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십팔번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애창곡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유래였지만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07:55 가미자카 공원
카미자까전망대(上見坂公園)는 표고 385m의 전망대로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 펼쳐진다.
이 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북큐슈
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 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소우씨는 히타족으
로 신라계이며 아비루는 황룡사지 장인 아비지 계통의 백제계통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어떤 학설에는 아비루계통은 고조선의 유민 계통이라는 설도 있다. 그 증거로는 아비루 문자가 있다.
이 아비루 문자가 단군시대의 문자 가림토 문자였다.
이곳에는 공원 안쪽에 자리 잡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대진지터와 내무반과
참호 등의 터가 지금은 무성한 덩굴에 뒤 덮인 채 남아있다
이즈하라와 미츠시마와의 경계이지만 카미자까공원이 개발되어 사계절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다
      
가미자카 전망대에서 본 공원 전경과 멀리 보이는 시라다케 산
      
↑↓ 전망대에서 본 아소만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가 쓴 시비 설명 중
      
시비
대마도를 중심으로 콤퍼스를 돌려 그린 세계지도와 야망을 드러낸 시이다
<1964년 지금은 비록 번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귀족이지만 아직도 대마도주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심정을 적은 시>
- 내용 -
‘섬도 비쩍 말랐다.
친구도 말라 있다
물고기 조각을 하면서 
바다 조류를 본다
아직도 나는 꿈이 있다
이런 말을 한다면
친구들은 조롱할 지 모르지만
심야(深夜)에 세계지도를 펴고
콤퍼스를 잡고 대마섬을 축으로 크게 돌려본다.‘

- 덕혜옹주 -
유학이란 미명 아래 일본으로 끌려갔던 덕혜옹주는 당시에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대마도의 소타케유키 백작과 결혼을 했다.
근데 이 백작은 덕혜옹주가 가진 지참금을 노려서 결혼을 한 것이었다.
따라서 둘 사이에 애정은 전혀 없었고, 남편의 냉대와 몰락한 나라의 왕녀에 대한 
섬사람들의 무시, 둘 사이에 태어난 딸아이의 죽음으로 매우 불행했다고 한다.
딸이 죽은 후에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병원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했다가 
결국엔 이혼 후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혼자 생활하다 쓸쓸히 죽어간 여인이다.
가미자카공원을 뒤로 하고 다시 이즈하라로 돌아온다.
면세점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쇼핑 안내를 하는데 상당히 영리하다
사야 할 것 보다 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며 믿음이 가게 만든다.
08:27 면세점
      
면세점이라기 보다 할인점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면세점이라면 화장품 같은 것이 보통 25-30%정도 싸야 정상이다
꼭 필요해서 50%차단 노베이아 썬크림 70㎖짜리를 32,000원에 샀는데
나중에 계산해 보니 일반 매장에서 보다 5-6%정도 싸긴 하지만 면세는 아니다
일행들 중 여자 분들이 해초 에센스를 앞 다퉈 사는데, 원래 여행가서 다른 일행이
쇼핑을 많이 해주는 게 나에게는 이롭다
많이 살수록 가이드의 기분이 좋아지고 하지만 나는 안사도 되고....
중국에서는 쇼핑하면서 다른 팀하고 섞일 때는 명찰이나 표시를 해서 팀을 구분하는데
여기는 아무런 조치가 없어 처음엔 진짜 면세점인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권을
지참하게 하는데(면세점이면 반드시 필요하니..) 여기서는 여권이 면세 목적이기보다
가이드 리베이트 계산 목적인 것 같다. 여권을 보고 누구 팀인지 알거니...
 
      
면세점 앞, 이즈하라 도심을 관통하고 있는 하천, 바닷물을 끌어들인 듯
쇼핑을 마치고 일행들은 다시 티아라로 모인다.
      
아리아케 산이 보이는 조용한 도심
어제 이 티아라 쇼핑몰 앞에서 일본인들의 질서 의식을 감탄하면서 느꼈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인데 나는 힝단보도에 진입하려면 최소 10걸음 이상을 걸어야하고
소형 승용차는 내가 진입하기 전에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통과 할 수 있는데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의지가 있는 걸 감지하고는 멀찍이 정지선에 정지하여 내가 통과하기를 
기다린다.
한 번 이었으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는데 그런 상황을 3번이나 겪고 나니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다.
      
9시 땡~ 하면 깜짝 세일을 하기 때문에 줄을 서있다. 
달걀 10개에 100엔이다
09:00 이즈하라를 떠난다.
나는 해외여행을 하면서는 가급적 차 속에서 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나라와 다른 것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느끼려고...
아마 가이드들도 그런 심정으로 관광객들이 잠들려면 Y담 X담을 내뱉으며
잠들지 않게 웃기려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간에 차창 밖에 스쳐지나가는 강이라도 마을하나라도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  
09:30 만관교(만제키바시)를 차 속에서 보며 건넌다.
가이드가 열정적으로 만관교(万關橋)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 다리는 萬關橋(만제키바시)라고 하며 철교인 이 아래로 만제끼 운하(万關戶)가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섬은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되는데, 일본은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이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쓰시마로 유도시켜 이 발틱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해전이 일어났던 시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강병 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고, 그 일환으로 일본 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해협  만제끼운하 건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1900년에 이르러 만제끼운하를 개통하여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입니다.
1904년 2월 6일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10일이 개전하자는 선전포고를 하고, 
2일 앞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것이 러일전쟁이었는데, 
그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일본을 가볍게 여겼으나, 1905년 3월 
만주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을 패퇴되는 일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런 전력의 약세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시키게 됩니다.
이 당시 일본 해군은 함정을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발틱 함대가 
이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수웨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대한해협으로 이동 중이었으나 일본이 이것을 알고 영국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함대가 수웨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습니다.
이 기간 중에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가 도중 기착지로 예상되었던 상해에 
들르지 않고 항진을 계속하자 연료와 시간의 절약을 위해 항로의 최단거리를 
예상하여 대마도에서 대기하고, 발틱함대는 예상대로 쓰시마해협으로 항진해 
옵니다.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 고 외치면서 일본 함대에게 정신무장을 시켰고, 결국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함대에 정면과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의해 괴멸되고 맙니다.
이 해전은 발틱 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여명 
사망. 일본해군 3척 침몰, 전사 117명이 말해주듯 일방적인 전투였습니다. 
이 쓰시마해전의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됩니다.
또한, 일본의 야욕은 팽창 일로의 길을 걷고, 우리나라는 일본에 36년간을 
지배당하게 되는 치욕적인 병합을 당하게 되고,
이후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되며 이 다리는 우리에게 
한이 어린 역사의 다리로 기록 됩니다.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는 쓰시마해협에서 자신의 어뢰정과 
잠복하며 이순신장군의 영령 앞에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노일전쟁당시까지 조선에서 잊혀진 사람이었던 이순신장군을 발굴해 낸 것은 
메이지 시절의 일본해군이었는데 그의 전사를 연구한 것도 일본해군이라고 합니다. 
세계사에 드문 23전 전승에 빛나는 이순신장군을 일본해군은 철저히 연구하며
발전시켰고 많은 해군생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연합함대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 뿐 만 아니라 , 해군상 야마모토 곤베이, 제2함대장 
시마무라 하야오, 참모장 아끼야마 사네유끼  등 그들 모두는 이순신에게 기도하며 
승리를 기원했다고 하는데. 정말 이순신장군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들어 준 것일까요??? 
현재 이곳에는 오렌지빛 아치 교량으로 가설되어 있는 이 다리는 세번째 다리이며, 
수심4.5~5m, 폭40~65m, 에 길이 210m 로 여행객들과 가족동행의 산책코스로 
절찬 받는 곳으로 눈길을 끌며 간조시 형성되는 조류의 소용돌이를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관광객들의 절찬을 받고 있습니다.

      
운하를 잇는 다리
나는 차에서 내려 운하도 내려다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우리 버스에 탔던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잠을 자고 있고, 잠들지 않은 사람들도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별로 버스에서 내릴 기분들이 아닌 모양이다
별 수 없이 나도 차 안에서 뒷 창으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한다.
 
10:02 에보시다케 전망대
대마도 내에서 유일하게 360도 동서남북을 조망할 수 있다
여기서 보는 아소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 리아스식 해안의 아소만이 잘 보인다
      

      
조망이 조금만 더 깨끗했다면 부산이 보일텐데...
      
우리 버스, 넘버 한번 좋다
      
아소만을 배경으로....
10:27 와타즈미(和多都美神社) 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변을 끼고 바다위에 서 있는 
두 개의 도리이(鳥井)를 포함한 총 다섯 개의 도리이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신신사이다. 
바다신을 모시는 신사로서 <5개>의 도리이가 일품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다 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 (또는 악어)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진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결국 일본 왕가는 
천신과 해신의 적자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고, 이 신사는 그 해신과 
아들을 모시는 가장 오래된 신사라 한다. 
 
가야계 신사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바다로부터 찾아온 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와타즈미 신사는 5개의 "도리(신사문)"가 있는데 2개는 바다에, 
한개는 바다와 바로 연결 되는 곳 ,두개는 신사 앞에 있는데 5개의 
도리가 일직선상으로  되어있고, 경주 김수로왕 무덤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와타즈미 신사 전경
      
진무천황의 탄생 설화를 설명하는 가이드
      
탄생한 장소
      
여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신사 안의 축소 쓰모장
      
신사 설명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는데 우리 팀은 도통 관심이 없다
      
신사에는 총 5개의 도리(鳥井)가 있는데 그 중 2개는 밀물이면 바다에 밑이 잠긴다.
      
곽~곽~ 소리가 들리 길래 올려다 봤더니...
와타즈미신사는 만조시 2m 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토리이 방향은 과거 서라벌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이 신사가 과거 '도해궁(바다를
건너온 궁)'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을 모신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된다.
 
      
5개의 도리면 고도리다....
우리가 갔을 때는  썰물이라서 그 신비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 
와따즈미신사를 뒤로 하고 이제 한국전망대까지는 1시간 20분정도를 가야한다
가는 도중에 가이드가 새로운 대마도 지명의 유래를 흥미롭게 설명하며 강력하게 우리 땅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대마도는~~~♬~~일본땅~~♪.........독도는 우리~~~♪~~땅’ 을 부른 정광태가 아주 싫단다.
대마도가 왜 일본 땅이라며......
대마도 지명의 유래가 보통 2가지 설로 보는데 살펴보면.....
대마도를 일본어로는 対馬(つしま)라고 적고  쯔시마 라고 읽는다.
쯔시마라는 발음은 한국어, 두 시마(2개의 시마)(시마라는 말은 섬을 뜻하는 일본어)
즉 2개의 섬으로 성립된다고 해서 두 시마 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대마도의 대표적인 산이 시라다케산인데 이 산의 정상 봉우리가 
말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라서 対馬가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일본어발음에는 두 라는 발음이 없어 예외 발음 규정을 두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 가이드는 새로운 설을 들고 나온다.
예전 부족국가 이전시대 때의 영토소유권은 쉽게 표현하면 보이는 게 임자 아니었겠느냐
부산 쪽에서는 대마도가 뻔히 보이고, 일본에서는 안 보이는데 누구 땅이었겠느냐
그리고 대마도란 지명도 마한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 유래가 되었다고 말한다.
뜻은 가상하지만 설득력이 없는 것이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지방 이라서 대마도가 보일 리가 없고
마산, 부산지역은 변한이었으니 그 설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은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알고 있듯이
이 참에 원광대 나종우 교수가 주장한 내용을 집어보기로 한다.

시민단체 활빈단(단장 홍성식)이 한 일본 극우단체의 독도상륙 시도에 반발, 
8월 중 일본 대마도까지 열기구를 타고가 ‘대마도=한국땅’이라는 선언을 
하기로 한 가운데 국내 역사학자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원광대 나종우 교수(원광대 사학과·한일관계사)는 6일 KBS 라디오 시사 
플러스에 출연해 “대마도는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 전 까지 우리 땅 이었다는 
사료가 광범위 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 땅이었다며 임란 전 까지 조선시대 때 
변방에 파견하는 관리였던 경차관, 채찰사등이 대마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세종원년(1419년) 대마도 정벌 때 근거로 삼은 것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라는 태종의 교유문이었다는 게 세종실록에 기록 돼 있다” 
며 “일본의 역사 자료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13세기 일본의 사서 ‘진대’ 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을 
비롯해 “1723년 대마도의 대학자 등정방이 편찬한 ‘대주편련락’이라는 책에도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행정구역)이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 교수는 또 동아닷컴과의 통화에서 일본 고사기에서 대마도를 지칭하는 
진도(쓰시마)는 ‘한반도에 가는 배가 머무는 곳’,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향지도는 
‘한국의 섬’ 이란 뜻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마도는 언제부터 일본 땅에 편입 됐을까.
나 교수는 그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꼽았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이나 일본 모두에게 척박한 땅인 대마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 주민에게 식량을 대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곳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이 임란 때 대마도를
한국 침략의 거점으로 이용하며 가치를 알아보고 자기네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마도가 확실하게 일본 영토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초 라는게 정설. 나 교수에 따르면 임란 이후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 
대마도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싹튼 민족의식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18일 대마도 반환을 최초로 
주장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이에 즉각 반박하면서 대마도에 대한 양국의 
관심이 본격화 됐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3년 동안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를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대마도=일본땅’ 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완성했다는 것.
나 교수는 “1965년 한일협정 때는 다른 중대 사안에 밀려 거론조차 하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느라 한국정부는 대마도 
문제는 거론조차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나 교수는 “일본은 시끄러울 때 마다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한다면 감정적 대응밖에 안 된다. 
하지만 대마도는 부산에서 불과 49.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리 땅이다
(대마도~후쿠오카는 147km). 우리는 만주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대마도도 잃었다”
며 “대마도는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정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2:12 한국전망대
전체가 한국에서 가져온 재료로 지어졌고 모양은 서울 파고다 공원 팔각정을 본 떴다한다.
 
전망대
      
부산 방향 자외선 때문에 아스라이 보이긴 하는데 사진에는 안 나온다
      
날씨가 좋을 때는 저렇게 부산의 야경이 보인단다.
      
부산과는 49.5㎞, 후쿠오카까지는 147㎞
 
      
순국비
1703년 2월 5일 부산 출발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사람4명(계112명) 전원이 
강풍으로 익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비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다.
당시는 수장된 분들의 명단을 알지 못했는데, 대마도주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宗家文庫를 정리하던 중 사망자들의 명단이 발견되어 순국400주년을 맞이하는 
2003년 3월7일에 순국자들의 이름을 적어 추가로 건립했다한다.
12:42 점심
      
이팝나무식당(히도츠바다꼬)
      
우동 정식 (우동+김롤2개+유뷰초밥2개+사시미3점)
      
식사를 마치고 해수욕장 가는 길에 팁을 걷고 있는 가이드
13:20 온천(해수욕)
      
무늬만 온천

      
탕 입구
      
깨끗한 휴게실
      
↑↓ 해안가에 많은 매가 노닌다.
      

14:25 히다카츠 항
      
떠날 시간
      
출국심사

<대마도를 떠나기 전 지도와 함께 정리해 본다.> 
1. 위  치 : 동경 129도 북위 34도
2. 거  리 : 한국 부산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47㎞
3. 면  적 : 708㎢(제주도 면적의 40%) 섬의 89%가 산림지대
4. 구  성 :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으며 그 중 5개 섬이 유인도
5. 행  정 : 쓰시마시(市)에 6개의 마치(町)가 있다
6. 총인구 : 37,842명/15,740세대(2007. 12현재)
         
6개의 마치로 이루어짐
         
한글로 표기된 지명들....
 
         
황색도로가 382번 국도 녹색도로는 지방도, 번호는 우리가 지나친 곳
 
14:50 히다카츠 출항
      
여객선 내부, TV에서는 한국과 러시아 여자 핸드볼 중계를 하고 있다
16:45 부산항 도착
      
돌아온 부산항
      
역시 우리 땅이 좋다
      
컨테이너들이 뱃속으로 쑥쑥 들어간다.
17:15 입국 완료
      
전주로 타고 갈 버스 기사가 안 온다. 전화번호 확인 중
      
기사 기다리는 중, 여자 양궁 단체전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다
17:45 여객터미널 출발
      
부산 시가지를 지나는 버스
19:30 산청휴게소
      
여기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순두부찌개로 통일
21:20 전주 도착
21:25 데바사키
      
데바사키에서 해단주
      
티비에서는 이탈리아에게 축구가 깨지고 있지만...
      
‘자~~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여행 때는 미리 현지 공부를 충분히 하고 가야겠다. 



2013. 11. 30현재 조회수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