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20 19:32
[중국]둘째날(소주)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795  
<2007. 12. 27(목) 둘째날> 
  
06:00에 모닝콜이 울린다 
  
 
07:00경 호텔에서의 아침식사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소주의 아침 
  
07:50에 버스는 호텔을 떠난다 
  
 
운하의 도시 소주 
  
쑤저우(소주,蘇州)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춘추시대 오나라의 수도로 자리 잡은 이래 2500년이나 
내려온 고도이다 BC 514년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이곳에 약 24㎞의 성벽을 쌓으면서 
도시가 형성되었고 
소주는 도시 전체에 운하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원나라 때 이곳을 다녀간 마르코폴로는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찬탄했다한다 
중국인들은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蘇杭)’이라 하여 소주와 항주를 ‘인간천당’이라 불렀다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남송시대 때부터 자수와 비단제품의 산출로 부유한 고장이었다 
쌀, 물고기가 풍부하여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 한다. 
운하와 정원의 도시로 이름난 이 소주는 ‘비단장사 왕서방’의 본 고장으로 관광도시이면서도 
중국의 실크산업을 주도하는 산업도시이다 
이런 탓으로 중국인들은 소주의 미인을 아내로 맞아 소주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졸정원 부터 들를 예정이었으나 호구산으로 일정을 바꾼다 
  
08:10 호구산 도착 
  
호구산은 춘추전국시대(BC 770-476년) 말기에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그의 아버지 합려(闔閭)의 
묘역으로 조성한 곳이다 그를 매장한지 3일째 되는 날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서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 
때문에 호구(虎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해발 36m의 호구산이 오나라중 제일 높은 산이란다 
  
 
호구산 입구 
  
 
호구산 입구 오른쪽에 있는 시검석(試劍石)이다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위해 잘랐다는 전설이 있는 돌이다 
  
 
1,000명이 앉아서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고하는 천인석(千人石) 
  
 
천인석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오왕 합려의 유체와 함께 3,000여개의 검이 이 바위 밑에 묻혀있는데 이 검지에서 
진시황과 손권이 명검을 발굴하려 했지만 단 1개의 검도 구하지 못했다 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에 두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이선정(二仙亭)’ 
  
 
검을 찾기 위해 파낸 자리엔 샘이 생겼다 
  
 
‘서시’가 이 구멍에서 내려다보이는 물로 거울을 삼았다한다 
  
서시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로 
그녀는 원래 저장성[浙江省] 주지[諸曁] 저뤄산[苧蘿山]의 서쪽에 살며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오(吳)나라에 패한 월왕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으려고 대부(大夫) 종(種)의 책략을 이용하여, 
두 미녀 서시와 정단(鄭旦)을 데려와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여러 가지 기예를 가르친 뒤 
재상 범려(范蠡)를 사신으로 보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오왕은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마침내 월에 패했다. 
서시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은 매우 많은데, 
오나라가 망한 뒤 범려를 따라 오호(五湖)에서 놀았다고도 전해지며, 
일설에는 오나라 사람이 분노하여 서시를 붙잡아 강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호구산 정상의 운암사탑 
  
 
  
 
  
운암사(雲岩寺)탑은 높이 47.5m인 8각형 7층탑인데 약 15도 기울어져 
눈으로 보기에도 기울어진 경사가 느껴진다. 
중국 최고(最古)의 벽돌탑으로 961년에 완성된 중국판 피사의 탑이다 
  
 
호구산에서 나와 졸정원으로 가는 차속에서.... 
  
09:10 졸정원 도착 
  
졸정원(拙政園)은 중국 4대 명원(名園)중 하나로 그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정원이 조성된 것은 명대의 왕헌신(王獻臣)이 관직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온 때인 1522년경, 진대의 시 한구절인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에서 
본 따 겸손의 의미로 지었다한다 
부지의 60% 정도가 연못으로, 연꽃이 피면 누각과 정자를 휘감은 물길 따라 안개 속에 
연꽃향이 그윽하고 정원은 동, 중, 서원 3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변화가 무쌍하다 
호수, 정자, 나무, 꽃 그리고 그림과 조각을 잘 조화시킨 남방정원의 백미이다.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배경인 대관원의 모델이 이 졸정원이라 한다. 
장가계의 비경이 수묵화라면 소주의 정원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왕헌신의 아들은 하루사이에 도박으로 졸정원을 날려버렸고 지금은 정부에서 관리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4대명원은 이 졸정원과 함께 북경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산장 그리고 소주의 유원(留園)이라한다 
  
 
졸정원 입구 
  
 
입장료가 한국 돈 8천원이나 한다네 
  
 
졸정원 평면도 
  
 
비가와도 비 맞지 않고 정원을 감상 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복도와 지붕 
  
 
↑↓ 4계절 계절마다의 운치를 만들어내는 정자들을 설명하는 중 
  
 
  
 
↑↓ 원향당 
  
 
  
 
쇳소리가 나는 돌 
  
 
박쥐의 발음이 ‘복’자와 같다고 해서 바닥에 박쥐형상을 돌로 새겨놨음 
  
 
↑↓ 원앙관과 원앙관 밑의 원앙들.... 
  
 
  
 
주인이 기거 했다는 ‘견산루(見山樓)‘ 
  
 
운수대통 어쩌고 저쩌고...... 
  
 
졸정원 안내도 
  
 
지금은 말라버린 샘터란다 
  
 
졸정원에서 나와서......운하 청소중인 배 
  
10:10 실크공장으로 이동한다 
  
 
실크공장으로.... 
  
 
고치에서 실을 뽑는 중 
  
 
번데기가 2개 들어있는 고치는 엉켜서 실을 뽑지 못하고 이렇게..... 
  
 
“자, 잡아당겨 보세요” 
  
 
급제하면 말이나 나귀를 타고 온다 해서 지붕에 말이나 나귀 귀를 상징하는 모형을 만들었다한다 
  
11:20 한산사 도착 
  
한산사는 서기 502년에 건립된 고찰이다. 
역대 중국의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5차례나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가 청대말에 재건되었다 
당나라 때는 일본에서 많이 유학을 오기도 했다 
당대 승려인 한산(寒山)이 머물면서 한산사로 부른다 
  
 
한산사 입구 
  
 
한산사 앞의 운하, 아주 더럽다 
  
 
한산사는 당대 일본 유학생이 많이 다녀가 그 영향으로 일본 절을 연상케 한다. 
  
 
한산사의 동탑 앞에서..... 
  
 
풍교야박의 싯귀를 설명하고 있는 중 
  
소주는 수려한 풍광 덕분에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하지만 정작 소주의 이름을 높인 것은 과거에 떨어져 시름없이 고향길을 가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다. 
절 마당과 회랑에는 이 시 한수 때문에 절을 찾았다는 청나라 강희제를 비롯하여 
많은 명사들의 서비(書碑)가 즐비하다 
  
 
풍교야박 전문 
  
  
 - 풍교야박(楓橋夜泊) - 
  
월락오제 상만천 (月落烏啼 霜滿天) 
강풍어화 대수면 (江楓漁火 對愁眠) 
고소성외 한산사 (姑蘇城外 寒山寺) 
야반종성 도객선 (夜半鐘聲 到客船) 
  
달은 지고 까마귀 울어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고, 
강풍교, 고깃배 불빛 수심에 잠겼구나. 
멀리 고소(오나라의 수도)성 밖 한산사의 그윽하게 울리는 
깊은 밤 종소리는 외로운 나그네의 뱃가에 다다른다. 
  
 
  
 
회랑의 달마상 
  
12:10 점심, 샤브샤브 
  
 
우리의 점심상 
  
 
↑↓ 상이 너무 커서 샤브샤브 불판을 하나 더 
  
 
  
13:15 라텍스 매장, ‘KAISER‘ 蔬州市 桐涇北路 26-3(TEL 0512-85888248) 
  
 
라텍스 매장, 높이가 높은 마음에 드는 베개를 7만원에 샀다 
  
13:50 소주 출발 
라텍스 매장을 마지막으로 소주를 출발하여 항주로 이동한다 
  
 
버스 속에서 일행들은 모두 피곤한 잠에 빠져있다 
  
소주에서 항주로 이동하는 버스의 차창 밖, 끝이 안 보이는 벌판을 내다보며 
몇 천 년을 거슬러 상념에 잠겨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를 만들어 낸 
그 치열했던 전쟁, 오나라의 소주와 월나라의 항주를 밟는 느낌은 시간을 초월하여 전장의 
함성이 귀에 울리는 듯 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서로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있게 된 경우나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서로 적대 관계인 오나라의 왕 부차와 월나라의 왕 구천이 같은 배를 
탔으나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서로 단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에서 유래한다 
출전은 손자(孫子)의 구지편(九地篇)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섶(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 
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딤을 비유 
관련고사[사기(史記)] 
춘추시대 월왕 구천과 취리(절강성 가흥)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 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언을 남긴다 
오왕이 된 부차는 선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때마다 부차는 임종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단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계책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 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치십시오’ 
하고 간언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의견에 따라 구천의 청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가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 보며(嘗膽) 그 치욕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치욕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그 해(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패권을 쥐기 위해 기(杞) 
땅의 황지[黃地: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 갔다 
그로부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소주(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와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절강성 정하(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그 후 구천은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한참 때 배웠던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데 버스는 휴게소에 정차한다 
  
15:20 포시(布市) 휴게소 
  
 
휴게소 
  
16:20 杭州明悅大酒店(명열호텔) (TEL 571 8606 6666) 도착 
시간이 어중간해 우선 호텔에 체크인부터 하기로.... 
  
 
항주 밍예호텔 로비 
  
 
호텔방에 짐을 풀고.... 
  
17:20 저녁식사 
  
 
콩을 멧돌로 갈아 직접 두부를 만들고 있다 
  
 
가이드가 서비스로 준 두부요리는 향이 심해 다들 피한다 
  
 
우리의 저녁식사 장소 ‘巴國布衣風味酒樓’(이거 어떻게 읽어야하나) 
  
18:30 추가 옵션으로 2만원짜리 발 맛사지 받으러.... 
  
 
‘건지원‘ 맛사지 받을 곳 
  
 
맛사지사를 기다리며... 
  
 
“아~~~ 좋다!!!” 
  
 
모두들 행복한 표정들... 
  
맛사지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밤참안주와 맥주를 사기로 한다 
  
 
항주의 KFC 
  
 
구멍가게에서 캔맥주가 위안화로 5원이다 한국 돈 6백원정도 
  
 
호텔방 823호에서 내다 본 항주의 밤거리 
  
 
20:30경 “자 통닭에 한 잔 하십시다” 
  
오늘도 역시 새벽 1시를 넘기고야 잠이 든다 
  

2013. 11. 30현재 조회수 : 1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