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3-07 12:42
만 원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114  

택시기사 치고 복잡한 아파트를
곡예 운전을 하며 들어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들이 엉키는 출퇴근 시간에는 더더욱...
하지만 나는 택시를 시작할 때부터
보통의 기사들이 기피하는 것을 기꺼이
기분 좋게 하리라고 초심을 굳혔었다
2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서
그 초심이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사실 이번 케이스가 그 희석의 증거 일지도 모르겠다.

2019. 2. 22(금) 08:30경의 상황이다
택시로서는 아침 08:30 전후로 10분 사이가
하루 중에 가장 피크타임이다
1분 1초가 아까운 때다
이때는 웬만하면 콜을 받지 않는다.
출근 손님들이 거의 길에 나와 차를 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을 잡게 되었다
롯데백화점에 손님을 내려주자마자
바로 코앞에 있는 대우대창아파트에서 콜이 온 것이다
출발지는 105동으로 되어있었는데
대부분의 소단지 아파트에서는
출근 시간이면 집에서 콜을 부르고
정문에 나와서 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치도 않고 
105동이 도로에 인접해있어서
간혹 도로에서 콜을 부를 경우에도
105동으로 뜨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손님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전화를 해봤다

"아, 지금 어디계십니까?"

"여기 105동 인데요 3, 4 라인으로 와주세요"

"...   "

이 시간에 턱 밑까지 와달라고?
더구나 새파랗게 젊은 놈 목소리다
끓어오르는 성질을 대꾸 안하는 걸로 눌러 참고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파트로 들어갈 차선까지 나오는 차들로 엉켜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빈 택시를 잡으려고 목을 빼고 안달하는 손님들이
세 팀이나 된다는 것이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진입 차선으로
앞대가리를 디리 밀며 빵빵거려 포악을 떨어
겨우 들어가는 차선을 확보하여 서서히 진입하며
젊은 놈에게 한마디 해줄 뼈아픈 말을 열심히 생각해 본다
그런데 3, 4라인에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보자
뽀독뽀독 올라왔던 분이 상당부분 풀린다.

'짜식이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젊은 녀석이 자그마하고 구부정한 마스크를 쓴
노부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잠시 떠올렸던 가시 돋친 여러 가지
생각과 말들을 순화시켜 더딘 동작으로 승차하는 노부인에게 건넨다.

"어서 오세요 천~천히 타세요."

아들은 같이 가지 않을 모양이다

"어머니 그럼 다녀오세요.
기사님, 대학병원으로 좀 부탁드립니다."

서서히 아파트를 빠져 나온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는데 노부인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참았다
가는 내내 노부인은 조용했다
나도 이내 운전과 음악에 집중하며 손님은 잠시 잊었다
대학병원 본관에 도착했고 요금은 5,300원이 나왔다
노부인은 손바닥에 꽉 쥐고 있던 만 원짜리를
콘솔박스 위에 놓으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아침)잉게 잔전(거스름돈)은 되얏어요"

나는 동전 700원은 다시 동전 통에 넣고
천 원짜리 4장을 주면서

"감사합니다."

노부인은 몸을 반쯤 차에서 내리다 말고
지폐를 든 내 손 앞에 손사래를 친다.

"되얏어요"

이렇게나 받을 자격이 있는 손인지 민망하다

택시비가 4~5천 원 정도 나왔는데
만 원을 주고 거슬러 받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갑자기 메모해놨던 기억이 떠오른다.

봄비 치고는 양도 많을 뿐더러
청승맞고 구슬프게도 내리는 밤이었다.
택시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은 지금 같았으면
일은 접고 막걸리 판이라도 벌렸겠지만
그 당시는 막 5개월로 접어드는 초심이 굳건한 시기라
그런 유혹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날 자정이 가까워오는 즈음 연이어
두 명의 손님에게 같은 상황을 겪는다.

2017년 4월 10일 23:25~23:50 사이
약 25분간에 일어난 일이다
중앙시장 진미집 부근에서 효자동 거성소라 아파트까지 가는
50대 이쪽저쪽 쯤 되어 보이는 남자손님이 탔다
술 냄새와 고기구운  냄새가 동시에 풍겼지만
술이 그리 많이 취해보이진 않았다
우산이 없어 서둘러 급히 택시 앞자리에 오른다.
나를 마치 아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다
목적지를 말한 뒤 말을 이어간다.

"택시 하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전에 뭐하셨어요?“

내가 택시를 시작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저 말 이였다
'택시가 안 어울린다.'
'택시 할 사람 같지 않다' 등
하긴 이때 내 헤어스타일이 장발에 뒷머리마저 덥수룩해
삼류예술가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날은 날씨 탓인지
그 남자의 어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싫지 않게 들렸다

"허허, 택시기사는 얼굴에 기사라고
낙인이라도 찍혀있답니까“

말을 이렇게 했지만
내 머리 속에는 전주역이나 버스 터미널에 줄지어있는 택시들과
그 옆에 내려 서성이는 머리는 새집 지고
꼬질꼬질한 등산복 바지에 저마다 등판 늘어진 패딩은 하나씩은 걸치고
구겨 신은 운동화에, 쓰리빠짝에 침을 뱉어가며 담배를 물고 있는
천박스런 기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래서 시내에서는 차에서 절대 안 내림)
그리고 마저 대답을 해줬다

"한참 때는 금융기관에 다녔죠“

"아, 그럼 정년퇴직 하시고
소일거리로 택시를 하시는군요“

"소일거리라뇨
퇴직은 좀 일찍 했고 이것저것 하다가 다 말아먹고
마지막 패로 붙잡고 있네요.“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수입은 좀 됩니까?“

보통은 손님들과 이런 대화를 길게 하지 않는데
상대의 태도가 진지하기도 하거니와 말투마저 정중하여
그냥 묵살해버리기가 어려웠다

"이 일은 좋게 말하면 거짓이 없네요.
창의성도 효율성도 필요 없고
요령 같은 건 더더욱 통하지 않고
수입은 그저 운전하며 돌아다니는 만큼에 비례합니다.
하다못해 신문배달도 오래하면 달인이 되고
구두닦이도 오래되면 장인이 되지만
택시는 오래하면 골병들어 폐인 될 것 같네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이일이 직업 중 가장
막장인 것 같아요 하하~“

"아 그럽니까?“

그 손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요금은 4,400원이 나왔다
그 손님은 만 원짜리를 주더니 잔돈을 챙기기도 전에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잔돈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차문을 세차게 닫고
비를 핑계 삼아 도망치 듯 빗속으로 뛰어가 버린다.
음...
짭짤하지만 서글프다
그 뒤로는 택시  운전에 대한 근천스러운 말을 잘 하지 않았고
그런 팁도 두 번 다시 받아 보지 못했다

그 남자 손님을 내려주고 불과 1분도 안되어
맥도날드 중화산점 앞에서 여자 손님을 태운다.
비 맞는 것 쯤 괜찮은 듯 서두르지 않고 느긋이 뒷좌석에 오른다.

"서신동 동해해물탕 뒤편 원룸 촌으로 가주세요“

"네“

비는 여전히 그렇게 내리고 있었고
나는 다시 조금 전 받았던 팁의 가치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흡족함과 씁쓸함 중 어느 게 더 클까?
이런저런 잡생각에 잠겨있는데
뒷좌석의 여자 손님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음악이 참 좋으네요
비오는 날과 너무 잘 어울려요“

"어, 클래식 좋아하세요?“

"아뇨 관심 있게 들어 본 게 오늘 첨이에요“

나는 운전하는 하루 종일 클래식 FM을 켜놓고 다닌다.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올 때야 당연히 볼륨을 높이고
집중을 해서 듣지만 보통은 배경음악으로 깔아 놓은 채
라디오랑 나랑 각각 논다
이 시간대(22:00~24:00)는 '밤과 음악 사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프로 중 하나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열심히 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 남자 손님 때문에 배경으로 밀려나 있다가
여자 손님 때문에 관심사로 등장한다.
그때 나왔던 곡이 ‘마탄의 사수 서곡’인지 ‘월리엄 텔의 서곡’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느 곡이든
비오는 날의 정서에 어울리는 곡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여자 손님의 입맛에는 딱 맞았나보다 아니면 택시 타기 전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
몇 마디 건네 보니 아는 건 베토벤의 ‘운명’ 정도였고
클래식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기악과 성악 정도부터 설명을 해 보려다가
‘아이고 내가 미쳤지’ 생각하고 참았다

“앞으로 관심을 가져보세요”

하고는 입을 다물었고 그녀가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원룸이 아닌 어느 2층 건물 앞에 정차를 부탁한다.
비 때문에 최대한으로 건물에 붙여서 차를 세웠다
미터기에는 4,600원이 찍혀있다
그녀 역시 만 원짜리를 주고는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되요”

그녀는 탈 때와 마찬가지로 서두르지 않고
내려서 차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잠시 동태를 살핀다.
그녀는 차 뒤쪽으로 돌아가 건물 1층의 문을 연다.
문을 열자 센서 등이 켜졌는데 바로 방으로 연결되는
현관인지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녀가 문을 닫기 전, 나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출발을 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씁쓸하다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나?

그녀가 처음 차를 탈 때로 돌아가서 되감아 본다.
술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반반 인 것 같다
그 시간에 움직인 동선으로 봐서는 화류계 쪽이 맞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옷차림이 너무 평범했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짐작 못하겠고
기혼인지 미혼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녀가 나에게 남기고 간 것은
도합 만 원 뿐이다  *